본문 바로가기

자연회귀

묘지를 자연보호구역으로


묘지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재정의하는 세계의 사례들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 묘지(Highgate Cemetery). 칼 마르크스의 묘비가 서 있는 이 빅토리아 시대 묘지의 지하 납골당 깊숙한 곳에는 희귀 거미 한 종이 산다. 동굴옆줄거미(Meta bourneti). 도심 한복판에서 멸종 위기를 피해 석조 납골당의 어둠을 안식처로 삼은 이 거미는, 어쩌면 묘지가 무엇인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존재일지 모른다.

묘지는 죽음을 가두는 곳인가, 생명을 품는 곳인가.

세계 곳곳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묘지를 단순한 석조 시설로 보는 시각을 넘어, 새와 곤충이 깃드는 자연보호구역으로 재정의하려는 실험들이다.
 


"런던 7대 묘지, 이제는 자연보호구역"

영국은 이 움직임의 최전선에 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조성된 런던의 7대 대형 묘지들은 20세기 들어 화장이 보편화되면서 매장 수요가 급감했다. 수익이 떨어진 민간 운영자들은 관리를 포기했고, 수십 년간 묘지는 방치됐다. 그런데 야생 생물이 먼저 알아챘다. 사람이 손을 놓자 자연이 돌아온 것이다.

현재 런던 7대 묘지는 모두 자연보전 목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방울새, 종달새, 여우, 박쥐, 나비류가 서식하며, 도심 속 생태계 섬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타워 햄릿츠 묘지 공원(Tower Hamlets Cemetery Park)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이 묘지는 아예 공식 '자연보전구역(nature reserve)' 지위를 획득했다. 지역 단체 조사에서 경내 생물 1,111종이 확인됐고, 딱정벌레류만 450종이 넘게 기록됐다. 35만 명이 잠든 곳이 동시에 수천 종의 생명이 사는 곳이 됐다.

하이게이트 묘지는 1975년부터 시민단체 '하이게이트 묘지의 친구들(Friends of Highgate Cemetery Trust)'이 자연보전구역으로 관리해오고 있다. 경내에는 40종 이상의 조류가 서식한다. 영국 조류 적색·황색 목록에 오른 멸종위기종인 솔딱새, 종달새, 버들솔새도 이곳에서 관찰된다.

브리스톨의 아노스 베일 묘지(Arnos Vale Cemetery)는 자연보전관심지역(SNCI)으로 지정되어 박쥐 탐사 행사와 올빼미 야간 투어를 운영한다. 런던 넌헤드 묘지(Nunhead Cemetery)는 지역 자연보전구역으로 공식 등록됐다.

영국 자연사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 역사적 교회의 60~90%에 박쥐 서식지가 존재한다. 피피스트렐 박쥐 한 마리는 하룻밤에 모기류를 3,000마리까지 잡아먹는다. 교회 묘지가 도시 생태계의 해충 방제 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맨체스터시는 아예 정책으로 이 방향을 추진 중이다. 도시 생태학자 만디 엘퍼드(Mandy Elford)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구역에서는 사람들이 이미 찾아오지 않아요. 거기엔 풀을 조금 남겨둡니다. 식물이 자라고, 곤충이 오고, 그게 전부예요."
 


스웨덴, 유네스코도 인정한 '숲과 죽음의 공존'

스웨덴의 접근은 다르다. 방치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연과의 통합을 설계했다.

스톡홀름 남부에 위치한 스코그스쉬르코고르덴(Skogskyrkogården, 삼림묘지)은 1917년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와 시구르드 레베렌츠가 설계했다. 기존 소나무 숲과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건축물을 자연 속에 녹여 넣었다. 묘비는 작고 균일하다.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철학이 공간에 담겼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20세기에 조성된 장소로는 두 번째였다.

경내에는 노루 20여 마리가 상시 서식한다. 방문객이 걸으면 묘비 사이에서 노루가 고개를 든다. 죽음의 공간과 생명의 공간이 하나로 겹쳐 있다.
 


오스트리아, 묘지 생물다양성을 도시 정책으로

비엔나 중앙묘지(Zentralfriedhof Wien)는 시(市)와 협력해 '묘지 생물다양성(Biodiversität am Friedhof)'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연례 생물다양성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교육 기관과 연계해 묘지 내 야생 생물을 시민에게 공개한다. 꿀벌 방목지도 조성됐다.

학술적 근거도 축적되고 있다. 묘지는 저강도 토지 이용으로 유지되는 특성상 주변 도시 개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연 식생의 섬'이 된다. 희귀·멸종위기 식물종의 피난처로 기능한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발표됐다. 북미에서는 50년 이상의 연구를 통해, 묘지가 멸종위기 키 큰 초원(tallgrass prairie) 생태계의 마지막 잔존지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미국, 묘지와 토지신탁을 법적으로 결합하다

미국은 제도 혁신에서 가장 앞서 있다.

1996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의사 빌리 캠벨(Billy Campbell)이 램지 크릭 보전지(Ramsey Creek Preserve)를 설립했다. 그는 두 가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장례에 들어간 과도한 비용, 그리고 뉴기니의 '정령 숲(Spirit Forests)'... 매장된 자들의 영혼이 숲을 사냥과 벌목으로부터 지킨다는 전통 신앙이었다.

2006년 램지 크릭은 비영리 토지신탁 '업스테이트 포에버(Upstate Forever)'와 협약을 맺어, 이 땅이 영구히 야생 상태로 보전되도록 법적 장치를 갖췄다. 2005년 설립된 그린버리얼 카운슬(Green Burial Council)로부터 미국 최초의 '보전매장지(Conservation Burial Ground)' 인증도 받았다.
 


플로리다의 프레리 크릭 보전 묘지(Prairie Creek Conservation Cemetery)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알라추아 보전 트러스트(ACT)와 협력해 93에이커 부지에 보전 지역권(conservation easement)을 설정, 개발을 영구 차단했다. 인접한 알라추아 보전지 606에이커, 페인즈 프레리 주립공원 21,000에이커와 연결되는 광역 생태 네트워크의 일부가 됐다.

현재 미국에는 약 220개의 자연매장 묘지가 운영 중이며, 그중 보전지 인증을 받은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죽음의 공간을 생태계 보전 수단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국 묘지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이 흐름을 한국에 비추어보면 질문이 생긴다.

한국의 공설묘지와 수목장림은 '자연친화적 장사'를 표방하지만, 생태계 보전 기능을 제도적으로 갖춘 곳은 없다. 수목장은 나무 밑에 묻는 행위 자체에 그치고, 그 땅이 실제로 생물다양성에 기여하는지를 측정하거나 보전하는 체계가 없다.

영국 모델은 '방치 후 자연화 → 사후 자연보전구역 지정'의 경로를 밟았다. 미국 모델은 '계획 단계부터 토지신탁 연계 → 법적 개발 불가 설정'이다. 둘 다 장사법 체계 안에서 묘지를 단순 시설물이 아닌 생태 자산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한국 장사법은 묘지를 누가 설치하고 관리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 땅이 어떤 생명을 품느냐는 아직 논의의 바깥에 있다.

죽은 자의 땅이 산 자의 숲이 되는 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계는 이미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