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을 다루는 산업이 죽음을 연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비유가 아니다. 한국 장례업의 현실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면 수익은 병원으로 간다. 그 수익이 장례 연구에 재투자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다. 병원은 장례식장을 부대시설로 운영한다. 안정적인 수익원이다. 그러나 장례는 병원의 본업이 아니다. 연구는 본업에 한다. 장례는 수익을 내되 연구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으로 남는다.
상조회사도 다르지 않다. 수의, 관, 운구, 각종 의전 서비스까지 한 건의 장례에서 나오는 매출은 작지 않다. 그러나 그 수익이 장례서비스 혁신으로 이어졌다는 흔적이 없다. 상조의 본업은 장례가 아니라 회원 모집이기 때문이다. 연구는 본업에 한다. 장례는 여기서도 수익을 내되 연구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으로 남는다.
결국 한국 장례업 전체에서 장례를 본업으로 대하는 주체가 없다.
병원에게 장례는 부대사업이다. 상조에게 장례는 명분이다. 장례식장 전문업체는 공간을 임대한다. 장례용품업체는 물건을 판다. 누구도 장례 자체를 연구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연구는 학술적 탐구를 말하는 게 아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춘 서비스의 혁신, 유족의 고통을 덜어줄 실천적 프로토콜 개발을 의미한다. 더 나은 임종을 위해, 더 나은 애도를 위해, 더 나은 유족 지원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주체가 한국 장례업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다. 구조적 공백이다.
의료업은 연구한다. 더 나은 치료를 위해 임상을 쌓고 프로토콜을 개발한다. 요양업도 연구한다. 노인 돌봄의 질을 높이기 위한 케어 모델이 축적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는 산업들은 연구한다. 그런데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직접 다루는 장례업만 연구하지 않는다. 수십 년째 같은 방식으로 빈소를 차리고, 같은 방식으로 입관하고, 같은 방식으로 발인한다. 형식은 고착되고, 내용은 공허해졌다. 그것을 혁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관성이라 부른다.
연구가 없으니 축적도 없다.
임종 직전 가족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이 없다. 사별 후 유족의 심리적 붕괴를 어떻게 완충할 것인가에 대한 프로토콜이 없다. 가족 해체 시대에 1인 가구가 혼자 맞는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고 존엄하게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 사전 설계 모델이 없다. 무연고 사망자의 마지막을 어떻게 의미 있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업계 차원의 논의가 없다. 장례업이 수십 년간 수익을 올리는 동안, 이 질문들은 단 한 번도 업계의 공식 의제가 되지 못했다.
그 공백은 사회가 떠안는다.
장례업이 답하지 않은 문제들은 복지 행정으로, 지자체 예산으로, 민간 봉사단체로 흩어진다. 고립사 문제는 복지부 소관이 되었다. 무연고 장례는 지자체가 떠맡는다. 유족 심리지원은 민간 상담소의 영역이 되었다. 장례업이 스스로 답했어야 할 문제들을 사회 전체가 비효율적으로 나눠 처리하고 있다. 그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된다. 장례업은 수익을 가져가고, 책임은 사회에 남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장례업에서 연구개발이 수익으로 연결되는 경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더 나은 유족 심리지원 프로그램을 개발해도 그것이 곧장 매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이다. 장례는 갑작스럽게 발생하고 유족은 비교할 여유 없이 결정을 내린다는 구조적 특성이 오히려 연구의 필요성을 높인다. 소비자가 비교하지 못하는 시장일수록 공급자의 자발적 연구와 윤리적 책임이 요구된다. 비교가 어렵다는 이유로 연구를 생략하는 것은 독점적 지위를 악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연구하지 않는 산업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죽음의 문제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1인 가구의 고립사는 늘고 있다. 무연고 사망은 매년 증가한다. 디지털 유산 처리는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고령 인구의 임종 돌봄 수요는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다. 이 변화들은 장례업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업계는 이 문제들을 외면한 채 여전히 빈소 꽃 장식을 다듬고 수의 원단을 고른다. 죽음은 변했는데 장례는 변하지 않았다.
따라가지 못하는 산업은 결국 사회로부터 외면당한다.
장례업이 지금 직면한 위기는 수요 감소가 아니다. 죽음은 줄지 않는다. 위기는 신뢰 상실이다. 소비자는 장례업이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연구하지 않는 산업이 진지할 수는 없다. 수익을 올리면서 연구하지 않는 산업은 진지한 것이 아니라 안일한 것이다.
한국 장례업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빈소가 아니다. 더 화려한 수의가 아니다.
죽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임종을 설계하는 사람들이다. 유족의 애도를 지원하는 체계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고립된 죽음에 응답하는 모델을 개발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변화에 산업의 언어로 응답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을 다루는 산업이 죽음을 연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더 이상 한국 장례업을 설명하는 문장이 되지 않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기존 업계의 자발적인 각성과 행적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관성에 젖은 이들이 전락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제는 죽음의 가치를 새로 쓰고 연구하는 '진짜 주체'들이 나타나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때다.
그 변화를 포기하고 외면하는 순간, 장례업은 죽음을 다루는 산업이 아니라 죽음을 소비하는 산업으로 완전히 고착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전락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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