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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엔딩

촛불 세 개

 

촛불 세 개


모든 단절은 처음에 침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끝내 침묵으로 완성된다.

 



영정 사진


아버지는 밤 열한 시에 돌아가셨다.

기태는 혼자 영정 사진을 골랐다. 형제들에게 연락했지만 기철의 전화는 꺼져 있었고, 기수는 세 번 울리다 끊겼다. 기태는 네 번째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그 사실이, 아버지의 죽음보다 먼저 그를 무너뜨렸다.

장례식장 빈소는 좁고 서늘했다. 기태는 혼자 상복을 입고, 혼자 조문객을 맞았다.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영정 속 아버지의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늘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끝내 삼켜버리는, 그런 눈.

* * *
사흘이 지났다. 기철도 기수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장례 내내 기태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절을 받고, 혼자 울었다. 조문객들은 눈치 없이 물었다.

"형제분들은요?"

기태는 매번 같은 말로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서요." 그 사정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노트


발인 다음날, 기태는 아버지의 방을 정리했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노트가 나왔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노트의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태야, 기철아, 기수야. 이 글이 너희한테 닿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번은 써야 할 것 같아서.

기태는 그 자리에서 노트를 덮었다. 손이 떨렸기 때문이다. 한참 만에 다시 펼쳤다.

노트에는 아버지가 평생 혼자 짊어진 것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 일에 대한 회한. 세 아들이 차례로 등을 돌린 이유를 오해한 채 수십 년을 혼자 품고 살았다는 것. 기철이 빚에 쫓기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 상할까봐 차마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다는 것. 기수가 연락을 끊은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믿어온 것.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딱 한 줄만 쓰여 있었다.

미안하다. 그 말 한마디를 못 해서, 이렇게 됐구나.

기태는 그 한 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재산도, 땅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것은 평생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가족의 아픔' 그 자체였다. 유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너무 소중한 것.

 



기철


기태가 기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십이 년 전이었다.

그날 기철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기태는 거절했다. 그게 전부였다. 이유가 있었고, 설명도 했지만 기철은 끝내 듣지 않았다.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기철은 말했다.

"형한텐 이제 아무것도 기대 안 해."

기태는 그 말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박혀 있었다. 뽑으려 할수록 더 깊이 박히는 가시처럼.

장례 후 기태는 기철의 조의금 몫을 담은 봉투를 들고 그의 마지막 주소로 찾아갔다.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물었더니 한 달 전부터 월세가 밀렸다고 했다. 어디 갔는지는 모른다고.

기태는 봉투를 우편함에 넣었다. 며칠 후 다시 갔을 때, 봉투는 그대로 있었다.

* * *
기철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세 달 뒤였다. 어두운 반지하방에서, 혼자였다. 옆에는 빈 소주병 하나. 형에게 전화를 걸려다 지운 흔적이 수십 개, 핸드폰 통화 목록에 남아 있었다.

기태에게 연락이 온 것은 냄새가 먼저였다고 했다. 이웃이 신고했고,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기철은 이미 일주일째 그 자리에 있었다.

기태는 전화를 받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노트가 펼쳐진 채 식탁 위에 있었다. 미안하다. 그 말 한마디를 못 해서.

 



기수


막내 기수는 번호를 바꾸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연락을 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태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기수의 원룸은, 처음 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기태는 계속 찾았다. 두 달을 헤맸다. 기철의 부고가 난 다음날, 기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알고 있어. 오지 마.

기태는 문자를 삼십 번도 넘게 읽었다. 다섯 글자. 그게 전부였다. 그나마 살아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기태는 그것에 감사해야 했다. 감사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기태는 답장을 보냈다.

그래, 안 갈게. 잘 지내라.

기수는 읽었다. 하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 * *
나중에 기태가 알게 된 것은 이러했다. 기수는 그 무렵 고열로 쓰러졌다가 혼자 회복했다는 것. 핸드폰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연락처를 저장해두고, 그 이름을 오래 들여다봤다는 것. 하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것.

누가 말해줬냐고? 아무도 없었다. 기수의 원룸을 정리하러 갔을 때 쓰레기통에 버려진 핸드폰 메모장을 기태가 우연히 열었고,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화하고 싶었는데. 형한테. 그냥 목소리라도. 근데 내가 먼저 잘라놨잖아. 내가 잘라놨는데 내가 왜 전화해.

기수는 기철이 간 지 두 달 뒤에 갔다. 원인은 패혈증이었다. 제때 병원에 갔다면 살 수 있었다고 의사가 말했다.

기태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너무 많이 느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상태였다.

 



수목장 숲에서


겨울이었다.

기태는 두 개의 유골함을 들고 아버지가 잠든 수목장 숲으로 갔다. 나무들 사이에 낡은 접이식 식탁을 펼쳤다. 읍내 중고 가게에서 산 것이었다. 네 개의 다리가 고르지 않아 한쪽이 살짝 기울었지만, 기태는 고치지 않았다. 살아생전 우리 집이 늘 저랬으니까, 하고 생각했다.

식탁 위에 네 개의 그릇을 놓았다. 아버지 것, 기철 것, 기수 것, 그리고 자신의 것. 한 번도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는 네 사람이, 이제야 한자리에 모였다.

* * *
촛불 세 개를 켰다. 아버지 몫은 이미 오래전에 꺼져 있었으므로, 나머지 세 개였다.

바람이 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기태는 두 손으로 감쌌다.

그때 바닥에서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바람에 날려온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수목 아래 누군가 놔두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흑백 사진이었다. 세 아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기태는 가운데였고, 왼쪽이 기철, 오른쪽이 기수였다.

셋 다 웃고 있었다.

* * *
기태는 사진을 가슴에 대고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제야 왔냐... 이 못난 놈들아."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시 말하려 했지만 목이 막혔다. 그래도 괜찮았다.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까.

울음소리가 숲속으로 번졌다. 나무들은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늘게, 나중에는 굵게.

촛불은 하나씩 꺼져갔다. 기태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마지막 촛불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아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식탁 앞에 홀로 앉아.

 



유산


봄이 되어 기태는 수목장 숲에 다시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잠든 나무 옆에, 기철과 기수의 이름으로 각각 나무 한 그루씩을 심었다.

세 나무는 나란히 섰다. 살아생전 나란히 서본 적 없는 세 형제가, 이제는 뿌리를 맞대고 서 있었다.

* * *
기태는 아버지의 노트를 그 숲에 묻었다. 글자들이 흙 속에서 서서히 번지고, 언젠가 빗물에 씻겨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글자가 아니라 뿌리로,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서로에게 닿는 것.

기태는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버지가 남긴 진짜 유산은 돈도 땅도 아니었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회한이었고, 그 회한을 끌어안고도 끝까지 기다렸던 한 사람의 고독이었다.

그리고 그 고독이 이제, 기태의 것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거리는
같은 핏줄 사이에 생긴 침묵의 거리다.

그리고 그 거리를 좁히는 데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평생도 모자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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