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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엔딩

상주들이 싸우는 이유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니다

 

빈소 뒤편에서 벌어지는 진짜 드라마, 장례식장에서 시작되는 가족의 재편

 

장례지도사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말이 하나 있다. "고인을 모시는 일보다 남은 가족을 모시는 일이 더 어렵다." 처음 들으면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빈소 상담실에서 하루만 지켜보면 금세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큰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은 의외로 고인을 어디에 모실지 결정할 때가 아니다. 누가 상주 완장을 찰 것인지, 부고를 누구 이름으로 낼 것인지, 영정사진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에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형이 왜 상주야?", "평생 부모님은 내가 모셨는데?", "이제 와서 효자인 척하지 마." 슬픔으로 가득해야 할 빈소가 순식간에 오래된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흔한 형제간 다툼처럼 보인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가족을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정서적 시스템으로 보는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s Theory)에 따르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단순히 한 사람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중심축 하나가 갑자기 빠져나가는 일이다. 그동안 집안의 결정을 내리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형제 사이를 중재하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늘 희생하던 사람과 늘 소외감을 느끼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그 질서가 한순간에 흔들린다. 가족 전체의 불안은 급격히 높아지고, 사람들은 그 불안을 견디기 위해 눈앞의 가장 구체적인 문제에 매달린다. 그래서 실제 갈등의 원인은 부모의 죽음에서 비롯된 불안인데도, 다툼은 상주 완장이나 부고 문구, 꽃 장식, 수의처럼 상징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싸움의 이유는 완장이 아니라, 완장이 대신 떠안은 감정인 셈이다.

 

이런 장면은 부모를 오랫동안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모셨던 가족에게서 더욱 자주 나타난다. 장기간의 간병은 형제자매 사이에 쉽게 보이지 않는 빚과 죄책감을 남긴다. 누군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을 오갔고, 누군가는 경제적인 부담을 더 많이 졌으며, 누군가는 멀리 산다는 이유로 거의 함께하지 못했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애써 덮어두었던 감정들이 임종과 동시에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때 네가 한 번만 더 왔어도", "병원비는 결국 내가 다 냈잖아", "이제 와서 왜 결정은 네가 하려고 하느냐."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대부분 그날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몇 년 또는 몇십 년 동안 미뤄졌던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인 경우가 많다.

 

이때 가장 난처한 사람은 의외로 장례지도사다. 대부분은 자신을 중립적인 진행자라고 생각하며 상담실에 들어간다. 하지만 가족체계이론에서 보면 장례지도사는 금세 그 가족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형제 둘 사이의 긴장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제3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삼각관계'라고 부른다. 실제 상담실에서도 "선생님도 보셨죠? 원래 우리 형이 저래요", "이 정도면 제 말이 맞는 거 아닙니까?", "누가 상주를 하는 게 맞는지 말씀 좀 해보세요."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장례지도사가 무심코 한 사람의 말에 더 오래 귀를 기울이는 순간, 다른 가족은 이미 그를 '상대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장례 절차를 돕던 사람이 가족 갈등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가족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누구나 예상하는 공개 충돌형이다. 장지를 어디로 할지, 장례 규모를 얼마나 크게 할지, 수의를 좋은 것으로 할지까지 모든 결정마다 의견이 충돌한다. "아버지 체면이 있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사람과 "평생 검소하게 사신 분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사람이 맞선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부모의 뜻을 가장 잘 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하지만 마음속에는 모두 '잘 보내드리고 싶다'는 같은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불안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상대의 의도보다 자신의 방식만 옳다고 믿게 된다.

 

반대로 겉으로는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긴장되는 가족도 있다. "알아서 해주세요." 상담을 시작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이런 말이 나온다면 장례지도사들은 오히려 더 신중해진다. 모든 결정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편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슬픔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할 힘이 없거나, 혹은 누구도 먼저 말을 꺼냈다가 책임을 떠안을까 봐 침묵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례가 끝난 뒤 "왜 그때 그렇게 했느냐"는 원망이 시작되는 가족들도 상당수가 이런 유형이다. 그래서 좋은 장례지도사는 모든 것을 대신 결정하기보다 가족이 작은 결정 하나라도 직접 내릴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 준다. 영정사진을 함께 고르게 하고, 헌화 순서를 정하게 하고, 손주에게 꽃 한 송이를 직접 올리게 하는 일도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가족이 마지막 이별에 참여하는 과정이며, 애도를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시간이다.

 

 

물론 장례지도사에게 가장 어려운 순간은 유가족의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다. 꽃이 조금 늦게 도착하거나 식순 안내가 매끄럽지 않았다는 이유로 날카로운 항의를 받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많은 베테랑들은 그 화를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유가족이 화를 내는 대상은 장례지도사가 아니라 죽음 자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었다는 현실을 향한 분노와 허탈감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제 잘못은 아닙니다"라는 말보다 "안 그래도 힘드신데 더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해결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가 상황을 훨씬 빨리 가라앉히곤 한다.

 

갈등이 시작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가 옳은지를 판정하는 순간 장례지도사는 심판이 되어 버린다. 대신 "아버님이라면 지금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요?"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 질문 하나가 형제들의 시선을 서로에게서 고인에게로 돌려놓는다. 누가 더 효자인지를 따지는 싸움에서 '우리는 결국 같은 사람을 보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장례식은 죽은 사람만을 위한 의식이 아니다. 남은 가족이 부모 없는 새로운 관계를 처음 연습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빈소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누군가의 인성이 나빠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시스템이 갑작스러운 상실 앞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으려 몸부림치는 과정일 때가 많다. 좋은 장례는 꽃이 가장 화려하고 절차가 가장 완벽한 장례가 아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퍼하는 가족들이 끝내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않고, 같은 사람을 함께 배웅했다는 기억을 남기는 장례다. 어쩌면 장례지도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장례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가족 곁에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이 되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