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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여행

내시네 산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죽은 뒤 제사가 끊기는 일이었다.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들였고, 족보를 만들었고, 문중을 키웠다. 이름 하나를 몇 대 뒤까지 남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쏟았다.

 

그런데 서울 초안산에는 그 상식을 뒤집는 무덤들이 남아 있다. 누구보다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애썼던 사람들, 누구보다 무연고를 피하려고 치밀하게 대비했던 사람들이 결국 가장 먼저 이름을 잃었다. 초안산이 오래전부터 '내시네 산'이라 불린 것도 어쩌면 그 역설 때문인지 모른다.

 

사대부도 묻히고 상궁도 묻히고 평민도 묻힌 산인데, 사람들은 결국 이곳을 내시의 산으로 기억했다. 내시가 가장 많이 묻혀서가 아니다. 관리되지 않은 흔적이 가장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목이 잘린 동자석과 쓰러진 비석, 글자가 닳아 이름을 읽을 수 없는 묘비들이 산의 풍경이 되었고, 개별 내시의 이름은 사라진 채 '내시네 산'이라는 집단적 기억만 남았다.

 

 

처음에는 이유가 단순해 보인다. 내시는 자식을 둘 수 없었으니 무덤도 쉽게 버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초안산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내시들은 혈연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혈연을 붙잡으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경국대전》은 내시가 세 살 이전에 거세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 아이나 들이기보다 형제의 아들, 곧 친조카를 양자로 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자식을 둘 수는 없어도 가장 가까운 핏줄이 자신의 제사를 이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혈연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은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혈연에 가까운 형태를 끝까지 붙잡으려 했다고 해야 맞다.

 

그 노력은 승극철 가문에서 절정에 이른다. 조부 연양군 김계한을 시작으로 철종 연간까지 수백 명 규모의 내시 문중이 이어졌고, 혼인도 했으며 부부가 나란히 묻혔다. 족보도 남겼다. 겉으로만 보면 웬만한 사대부 가문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이상하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지금 초안산에서 주인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내시 묘는 승극철 부부 묘 하나뿐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청백아파트 주변에는 50기가 넘는 내시 묘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조카를 양자로 들이고, 족보를 만들고, 문중을 키운 사람들이 결국 가장 먼저 무연고가 된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이 글의 질문이 시작된다.

 

왜였을까.

 

혈연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다. 오히려 혈연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조카는 작은아버지의 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조카에게도 자기 부모가 있고, 자기 자식이 있고, 자기 조상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선순위는 조금씩 바뀐다. 몇 대만 지나도 작은아버지의 묘는 '우리 집안 묘'에서 '옛날 친척 묘'가 되고, 다시 '누군가의 오래된 무덤'이 된다.

 

혈연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관심이 끊어진 것이다.

 

 

초안산에는 이와 정반대 사례도 있다.

 

상궁 개성 박씨의 묘는 직계 후손이 끊겼는데도 지금까지 봉분과 상석, 향로석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이유는 증조부 세대에서 갈라진 밀양 박씨 문중이 자신들과의 희미한 연고를 이유로 묘를 돌봤기 때문이다. 직계도 아니고 법적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느슨한 연결 하나가 수백 년 동안 묘를 지켜냈다.

 

그래서 무연고는 단순히 가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끝까지 기억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느냐의 문제다.

 

 

지금 한국은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6%를 차지한다. 혈연을 전제로 만들어진 장례와 추모 제도는 혈연이 약해지는 순간 쉽게 무연고 시스템으로 바뀐다. 하지만 실제 삶은 혈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가 있고, 평생 함께한 이웃이 있고, 멀지만 서로를 기억하는 친척도 있다.

 

초안산이 남긴 가장 큰 교훈도 여기에 있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그곳에 묻힌 내시들이 누구보다 무연고를 두려워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양자를 들였고, 족보를 만들었고, 문중을 키웠다. 죽은 뒤까지 계산하며 살았다. 그런데도 이름은 사라졌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혈연은 사람을 이어줄 수는 있어도, 기억을 영원히 이어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혈연을 더 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혈연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도 누군가 기억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초안산의 내시들은 혈연을 남겼다.

 

끝내 남기지 못한 것은, 자신을 끝까지 기억해 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