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걷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의 여정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가장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누군가 죽음을 입에 올리면 "재수 없게 무슨 그런 소리를 해"라며 손사래를 치거나, 연로하신 부모님이 뒷정리에 대해 말씀하실 때면 "어머니, 100살까지 사셔야죠"라며 황급히 화제를 돌리곤 합니다. 이러한 회피는 사랑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마주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대화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슬픔 중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만큼 보편적이면서도 주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망연자실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누군가는 신을 원망하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어떤 이는 고인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얻으면서도, 그 위안 때문에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이 복잡다단한 슬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닻은, 역설적으로 '죽음이 닥치기 전 나누는 대화'입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장례 절차나 재산 분할을 논하는 사무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어떤 가치를 지키며 살아왔는가'와 '남겨진 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고 싶은가'를 공유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철학적인 소통입니다.
젊은 세대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불편해하지만, 정작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년층은 자신의 마지막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때 깊은 소외감을 느낍니다. "엄마는 안 죽어"라는 식의 막연한 위로보다는, "어머니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혹은 "마지막 순간에 곁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질문이 그들에게는 더 큰 존중이자 사랑으로 다가갑니다. 이러한 대화는 떠나는 이에게는 삶을 정리할 평온을, 남겨진 이에게는 예고 없이 찾아올 슬픔을 감당할 '마음의 근육'을 길러줍니다.
슬픔은 갑자기 닥쳐오는 재난과 같지만, 죽음에 대한 대화는 그 재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돕는 지도와 같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원했던 방식의 작별,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 그리고 평소 나누었던 삶의 가치들은 남겨진 이들이 겪는 '파생적인 상실감'을 치유하는 힘이 됩니다. 수표책 잔액을 정리하며 고인을 원망하는 대신, 그가 남긴 기록 속에서 그의 노고와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아니라, 남은 삶을 어떻게 더 밀도 있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지막 안부를 미리 물음으로써, 슬픔이라는 거친 바다를 함께 건너갈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강요될 수 없지만, 준비된 이들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맞추고 조금은 서툴더라도 이렇게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은 무엇인가요?"
그 질문 끝에 우리는 죽음이 아닌, 비로소 찬란한 삶의 본질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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