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독한 엔딩

빈소를 거두는 것이 정말 관계를 거두는 것인가

무빈소 장례를 둘러싼 다른 시선

 

죽음은 개인의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죽음을 보내는 방식은 사회가 결정한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의례로 다뤄 왔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는 고인을 기억하고 남은 사람을 위로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빈소가 단순한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은 타당하다. 빈소는 고인을 떠나보내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평소 만나지 못했던 친척과 지인이 모이고, 관계가 다시 연결되는 경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증가하는 무빈소 장례를 곧바로 '공동체의 해체'로 해석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빈소가 수행했던 기능을 인정하는 것과, 그 형식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함께 모이는 일'이 본질이라는 전제부터 다시 봐야 한다

 

장례 의례의 핵심이 '함께 모이는 일'에 있었고, 죽음 앞에서 인간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장례라는 제도의 본질이라는 주장은 자주 반복된다. 그러나 이는 장례의 특정 형태, 즉 대규모 집단 조문 의례를 장례 일반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포함한다. 인류학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인간이 죽음을 혼자 처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 그 처리 방식이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유목 사회, 은둔 수도 공동체, 소수 가족 단위 매장 전통에서도 죽음은 사회적으로 다뤄졌지만, 그 형태는 대규모 회집이 아니라 가족이나 사제, 매장 전담자 같은 소수의 정해진 인물에 의한 절차였다. 즉 장례의 보편적 본질은 모임의 규모가 아니라 혼자 처리되지 않는다는 사회적 승인이며, 이 승인은 두 사람만으로도, 사후 절차를 맡은 한 명의 전문가로도 성립할 수 있다.

 

이 구분은 사소하지 않다. '함께 모이는 일'을 본질로 세우는 순간, 조문객이 많이 모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본질의 훼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문객의 규모와 애도의 진정성 사이에 필연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근거는 제시된 적이 없다. 오히려 소규모·비공개 임종이 더 깊은 애도를 가능케 한다는 보고도 있다. 따라서 장례의 본질을 '함께 모이는 일'이 아니라 '혼자 두지 않는 일'로 다시 세우면, 무빈소 장례도 그 본질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경로가 열린다. 조문객의 수가 아니라 임종 전후로 곁을 지킨 사람이 있었는가, 사후 절차가 무성의하게 방치되지 않았는가가 본질의 충족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빈소는 공동체였지만, 동시에 부담이기도 했다

 

빈소의 사회적 기능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빈소를 오직 아름다운 공동체의 공간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현실의 일부를 지우는 일이다.

 

한국의 장례문화에서 조문은 애도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의무였다. 부조금의 액수, 참석 여부, 조문객의 숫자는 때때로 인간관계의 위계와 친밀도를 확인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또한 유족에게 장례는 슬픔을 표현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노동이었다. 특히 가족 구성원 중 일부, 흔히 며느리나 딸에게는 사흘 동안 조문객을 접대하고 장례 절차를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집중되어 왔다. 애도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타인의 방문을 준비해야 하는 역설이 여기 있다.

 

이 역설에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빈소가 사라지며 우리가 잃는 것은 관계의 확인 기회이고, 벗어나는 것은 위계 확인과 접객 노동이라는 이름의 불평등이다. 둘은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비길 문제가 아니다. 후자가 특정 구성원, 특히 여성 유족에게 비대칭적으로 부과되어 온 부담이었다는 점에서, 이 노동의 소멸은 손실이 아니라 시정에 가깝다.

 

비어있는 빈소

 

무빈소는 관계의 해체가 아니라 관계 방식의 변화다

 

무빈소 장례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장례 산업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소비자로만 보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무빈소를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가족 규모의 축소, 1인 가구 증가, 약화된 친족 관계, 경제적 부담, 조문 문화에 대한 피로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들에게 무빈소는 관계를 거부하는 선택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새로운 이별 방식을 찾는 선택이다.

 

빈소의 존재 여부는 핵심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애도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는가이며, 이 질문에 대해서는 분명히 답할 수 있다. 빈소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충분히 애도하는 것은 아니었고, 형식적으로 조문객을 맞이하면서도 정작 애도를 유예해야 했던 유족들의 경험이 그 증거다. 반대로 빈소가 없다고 해서 애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가족끼리 조용히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것, 온라인 공간에서 고인을 기억하는 것, 시간이 지난 뒤 추모 모임을 갖는 것 역시 애도이며, 이를 애도의 결여로 규정할 근거는 없다.

 

'간소화'는 누구의 논리인가 - 답은 어느 한쪽이 아니다

 

장례의 간소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산업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장례 절차가 줄어들면 일부 사업자는 비용 절감과 운영 효율이라는 이익을 얻는다. 죽음이 산업 영역으로 들어온 이상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빈소 확산을 특정 산업의 설계 결과로만 보는 것은 균형 잡힌 분석이 아니다. 장례 산업은 오랫동안 전통적 장례 형식에서도 경제적 이익을 얻어 왔다. 삼베 수의와 상복, 입관용품 하나하나가 각각 별도의 매출 품목으로 유통되어 왔으며, 이 절차들이 존속해 온 이유가 순수한 전통 계승만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여러 조사에서 드러난 바 있다.

 

따라서 "간소한 장례가 산업의 논리인가, 전통 장례가 산업의 논리인가"라는 질문에는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라는 답이 맞다. 양쪽 모두 산업의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 기준은 어느 쪽이 산업 논리에서 더 자유로운가가 아니라, 어느 쪽이 개인의 존엄과 선택권을 더 잘 보장하는가여야 하며, 그 답은 형식의 유무가 아니라 유족에게 선택지가 실제로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 무빈소가 문제인 경우는 그것이 강요된 유일한 선택지일 때이고, 전통 빈소가 문제인 경우는 그것이 유족의 동의 없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될 때다. 두 형식 모두 강제될 때 문제이고, 선택 가능할 때는 문제가 아니다.

 

애도의 형식 변화와 사회 해체는 구분해야 한다

 

무빈소 증가를 사회적 아노미의 징후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는 단순히 의례가 변하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규범과 가치 체계가 약화되어 개인이 방향성을 잃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기준에 비추면 답은 명확하다. 장례 방식의 변화는 아노미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온라인 애도, 소규모 가족장, 사후 추모 모임 같은 새로운 애도 실천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규범이 붕괴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고 있다는 증거다. 형식의 변화와 관계의 소멸은 같은 의미가 아니며,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놓는 순간 논지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빈소가 아니라 애도의 기능이다

 

무빈소 장례에 대한 비판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비용과 효율만을 앞세우면서 인간에게 필요한 애도의 시간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이 우려는 유효하지만, 답은 빈소의 존속 여부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전통적 빈소 역시 완벽한 제도는 아니었다. 그 안에는 공동체의 위로도 있었지만, 의무와 부담, 경제적 비용도 함께 존재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장례문화가 답해야 할 질문은 빈소를 지킬 것인가 없앨 것인가가 아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지켜야 할 것은 공간이 아니라 기능이다. 남은 사람이 슬퍼하고 기억하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는 물리적 빈소 없이도 설계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대안들이 이미 등장하고 있다. 빈소가 사라지는 것은 관계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빈소가 사라진 자리에 그 기능을 대신할 구조를 아무것도 채워 넣지 않는다면, 그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실패이며, 그 실패의 책임은 무빈소라는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 이후를 방치한 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