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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과 산분, 그 사이의 선택지 ①레겐우른

자연회귀

by 다비코 2026. 8. 1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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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과 산분, 그 사이의 선택지 ①레겐우른

국내 장사 문화는 '봉안(납골)'과 '산분(散粉)·자연장'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봉안은 유골함을 특정 장소에 안치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설 이용 기간이 끝나면 결국 이장이나 처리 문제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 반대로 산분·자연장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상징성은 크지만, 한 번 흩뿌리고 나면 더 이상 물리적으로 찾아갈 자리가 남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레겐우른은 이 두 방식의 중간 지점에 있다. 유골이 한 곳에 '머무는 시간'을 만들어 봉안처럼 찾아가 애도할 장소를 제공하면서도, 그 시간이 지나면 빗물을 통해 서서히 흙으로 스며들어 결국 산분과 같은 결말에 도달한다. 즉 유족에게 "당장 놓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유예 기간을 주는 동시에, 종국에는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산분의 본질을 그대로 살린다.

최근 국내 여러 지자체와 화장장에서 조성 중인 산분장(散粉葬) 시설에 이런 방식을 접목해볼 수 있다. 지금의 산분장은 대개 유족이 한 번 방문해 유골을 뿌리고 떠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구조다. 여기에 레겐우른과 같은 완충 장치를 더한다면, 산분장 한켠에 일정 기간 머무를 수 있는 '과정형 안치 공간'을 함께 둘 수 있다. 유족은 처음부터 완전한 산분을 택하는 대신, 몇 년간 찾아가 인사를 건넬 장소를 먼저 갖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연으로의 온전한 회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조성 초기 단계에 있는 산분장이라면, 부지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런 중간 단계형 시설을 함께 배치하는 것을 검토해볼 만하다. 국내 장사법상 자연장·봉안 규정을 함께 충족하는 구체적 설계는 별도 법률 검토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이용자 경험의 관점에서는 '봉안이냐 산분이냐'라는 이분법 대신 세 번째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이별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면, 네덜란드에서 온 '레겐우른' 이야기

 

가족을 떠나보낸 이에게 세상은 종종 "이제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슬픔이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이별 또한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네덜란드의 한 디자이너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하여 만든 것이 바로 '레겐우른(Regenurn)', 우리말로는 '빗물 봉안함'이라 옮길 수 있는 '봉안+산분함'이다.

 

유리공예 장인이 던진 질문

 

레겐우른을 만든 이는 아르나우트 호프여스(Arnout Hoofjes)이다. 그는 25년 넘게 유리 공예 아틀리에를 운영해 온 장인이며, 봉안함 제작 업체인 Asglas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난 뒤, 그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 물음에서 나온 답이 바로 시간과 자연에게 이별의 역할을 나누어 맡기는 봉안함, 레겐우른이다.

 

레겐우른(Regenurn), AI 이미지

 

빗물이 천천히 흙으로 데려다주는 방식

 

레겐우른은 내후성 강철인 코르텐강(Corten steel)으로 제작된다. 화장을 마친 유골을 이 함 안에 안치하면, 그 이후의 과정은 아주 조용히 진행된다. 비가 내릴 때마다 빗물이 함 안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그 물은 유골을 조금씩 땅속으로 데려간다.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유골은 결국 자연스럽게 흙으로 돌아간다.

 

이는 한 번에 흩뿌리는 산골(散骨)과는 성격이 다르다. 산골이 명확한 '끝'을 만든다면, 레겐우른은 그 끝을 유예한다. 유족은 이 자리를 거듭 찾아와 기억하고 머무르며, 저마다의 속도로 이별을 완성해 갈 수 있다.

 

호프여스는 이렇게 말한다.

 

"레겐우른은 놓아줌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임을 보여준다. 애도가 하루 만에 끝나지 않는 것처럼."

 

 

유리 조각에 담기는 이름

 

레겐우른의 상단에는 크리스털 유리 오브제가 함께 놓인다. 피라미드형, 구형(球形), 큐브형 세 가지 형태 중에서 고를 수 있으며, 그 안에는 고인의 이름과 생몰년이 정교한 3D 레이저 기술로 내부 각인된다.

 

이 유리 오브제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레겐우른은 판매가 아닌 5년 단위 임대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임대 기간이 끝나 유족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면 코르텐강 함은 다른 고인을 위해 다시 사용되고, 이름이 새겨진 유리 오브제만이 유족의 손에 남는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다. 애도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제도 자체가 존중하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완성되는 디자인

 

코르텐강의 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깊어진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매끈한 금속이지만, 비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붉은 갈색의 녹, 이른바 '패티나(patina)'가 표면을 덮는다. 이 자연스러운 변화 덕분에 별도의 도장이나 관리 없이도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풍경과 더욱 잘 어우러지는 구조물이 된다. 유골이 흙으로 돌아가는 속도와, 함의 표면이 자연의 색을 입어가는 속도가 나란히 흘러가는 것이다.

 

네덜란드 최초의 설치

 

2026년 8월, 네덜란드 힐베르쉼(Hilversum)의 한 재단은 자국 최초로 자신들이 관리하는 묘지에 레겐우른과, 같은 디자이너가 만든 '메모리 브릭 월(Memory Brick Wall)'을 함께 설치하였다. 유리 벽돌에 이름을 새겨 넣는 메모리 브릭 월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준다면, 레겐우른은 '흘러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방식을 함께 두어, 유골의 일부는 벽에 영구히 남기고 일부는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조합 또한 가능해졌다.

 

결국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

 

레겐우른이 특별한 이유는 정교한 금속 가공 기술이나 세련된 유리 세공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은 봉안함은 '이별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자주 잊히는 사실을 물리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붙잡고, 기억하고, 마침내 놓아준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그 과정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준 것, 그것이 레겐우른이 지닌 진짜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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