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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엔딩

국가는 모든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국립 서울 현충원

 

국가권력은 묘지를 필요로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적어도 국가라는 공식적인 정치제도의 틀 안에서는 죽음은 공평하지 않다. 국가는 죽음에 차별을 둔다. 일반의 사적인 죽음과, 국가가 "희생"이라 명명한 공적인 죽음을 구분한다. 그리고 국가는 그 공적인 죽음을 매우 치밀하게 관리한다. 국립묘지가 바로 그러한 공적 죽음을 관리하는 제도적 공간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희생"이라는 이름은 죽은 자가 스스로 선언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살아남은 권력에 의해 부여되는 서사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면 국립묘지에 있는 것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가 아니라 "국가가 희생으로 명명한 자"다. 이름 붙이는 권한을 누가 쥐고 있는가, 이것이 국립묘지라는 제도의 핵심이다.

국립묘지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혹은 국가가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인정한 자들이 집단적으로 묻히거나 안치되는 장소다. 이들의 죽음은 육체적으로는 종결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린다. 새로운 국가권력이 등장하거나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 그들의 죽음은 정치적 생명력을 얻어 다시 되살아난다. 정권 교체기나 탄핵 국면마다 반복되는 현충원 참배 정치, 선거철마다 동원되는 호국영령·독립유공자 서사가 바로 그 증거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살아있는 권력은 그 침묵에 원하는 말을 얼마든지 채워 넣을 수 있다.

 

국립 서울 현충원


관리되는 죽음, 다투어지는 죽음

이 명명의 권한이 정치적 도구라는 사실은, 국가가 죽음을 관리하는 장면보다 죽음을 두고 다투는 장면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5.18 희생자들은 오랫동안 국립묘지 밖에 있었다. 그들의 죽음은 국가에 의한 죽음이었으나, 동시에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안장 대상이 되기까지 그 죽음 자체가 정치적 인정 투쟁의 대상이었다. 반대로 친일 행적이 있는 독립유공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둘러싼 반복되는 논쟁은, 한번 부여된 "희생"이라는 명패조차 정치 지형이 바뀌면 다시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국립묘지는 완성된 목록이 아니라, 누구를 넣고 누구를 뺄 것인가를 두고 매 정권마다 다시 협상되는 살아있는 정치 텍스트다.

국가는 왜 죽음에 차별을 두고 이를 관리하고자 하는가. 죽은 자가 국가와 정치과정에서 매우 긴요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라더(Olaf B. Rader)는 그의 저서 『사자와 권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은 자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화의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제례와 예식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저 단순한 절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직결된 엄숙하고도 요란한 의식, 그리고 그와 결부되어 끝없이 흐르고 용틀임하면서 거듭 태어나고 있는 집단적 일체감의 산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죽은 자를 경배하라! 권력구조를 다지려는 정치적 사자 숭배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과거에도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특히 구질서가 몰락함으로써 발생한 혼돈의 시기에 사자숭배는 새 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왔다. …… "권력은 죽은 자에게서 나온다."

 


죽음은 국가권력, 정치권력의 창출과 유지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된다. 국가를 위해 죽었다고 인정된 자들과 그들이 안치된 공간은 권력자의 영웅화를 위한 최상의 무대가 될 수 있다. 국가적 희생자로 명명된 자들은 그 자체로 영웅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리되지 않는 죽음이 말해주는 것

 

 

지금부터가 진짜 이야기다.

 

국가가 국립묘지 안치 대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를 이토록 치밀하게 다투고 관리한다는 사실 자체가, 거꾸로 국가에게 "관리할 필요가 없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가장 정확한 지표다. 관리는 선별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가 무엇을 정성껏 관리하는가를 보면, 국가가 무엇을 관리 대상에서 제외했는가가 동시에 드러난다.

국립묘지는 안장 대상자 한 명을 심의하는 데 심사위원회를 두고, 서훈을 따지고, 안장 적격 여부를 국가보훈부가 개별적으로 판단한다. 사후 몇십 년이 지난 인물의 친일 행적 하나까지 다시 꺼내어 국회에서 다툰다. 이것이 국가가 죽음을 다루는 최고 수준의 정교함이다. 그런데 바로 그 국가 안에서, 같은 시기 매년 수천 명이 아무런 서사도 부여받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다.

수치가 이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는 2019년 2,656명에서 2024년 6,366명으로 5년 사이 약 2.4배 증가했다. 특히 2022년 4,842명, 2023년 5,415명으로 급증한 데 이어 2024년에는 처음으로 6천 명을 넘어섰다. 2021년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발생한 무연고 사망자는 누적 2만 3,790명에 이른다. 여기에 별도로 집계되는 고독사 통계를 더하면, 2024년 한 해에만 3,924명이 가족이나 지인의 발견 없이 홀로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립묘지의 안장 대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행정 체계 안에서 사망이 확인되고, 화장이 처리되고, 서류가 작성된 사람들이다. 절차는 있다. 그러나 그 절차에는 심의도, 서사도, 기념도 없다. 그저 처리가 있을 뿐이다.

이 비대칭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다. 국립묘지에 묻히는 자는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죽었기 때문에 국가가 그 죽음의 의미를 독점하고 재생산할 유인이 있다. 반면 무연고사·고립사로 죽는 자는 애초에 국가와 정치적으로 아무 관계도 맺지 않은 채 죽는다. 그의 죽음은 어떤 정권에게도 소환할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국가는 그 죽음에 이름을 붙일 이유도, 기억할 이유도, 관리할 이유도 갖지 않는다. 국립묘지가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그 정교함의 그림자 아래 방치되는 죽음의 규모도 함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국립묘지의 존재는 "한국에 죽음 정책이 없다"는 명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명제를 완성한다. 한국에는 죽음 정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용한 죽음"에 대한 정책만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정교함으로 존재하고, 정치적으로 무용한 절대다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책이라 부를 만한 것이 처음부터 설계되지 않았다.

 

국립묘지는 국가가 죽음을 얼마나 정교하게 관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동시에 그 정교함이 왜 대부분의 시민의 죽음 앞에서는 멈추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선명한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