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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매장

2044년 봄, 서울추모식물원

 

더 이상 굴뚝 연기는 오르지 않는다


2044년 3월, 통일로 504번지 옛 서울시장묘사업소 부지.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반구형 건물이 아침 햇살을 받아 조용히 빛난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는 서울시립승화원의 굵은 굴뚝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갈 때마다 눈을 피했고, 아이들은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아무런 연기도 없다. 대신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나고, 주말이면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모와 도시락을 든 중학생 무리가 나란히 입장 게이트를 통과한다. "성묘하러 간다"는 말이 이제는 "식물원에 간다"는 말과 거의 같은 뜻이 되었다.


한국에서 천연유기환원법(NOR)이 「자연장법」 개정을 통해 공식 허용된 것은 2028년이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컸다. 언론은 '인체 퇴비화'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썼고, 종교계 일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15년이 흐른 지금, 국내 사망자 중 NOR을 선택하는 비율은 38%를 넘어섰다. 매장지 부족, 기후 위기, 그리고 죽음을 자연의 순환으로 받아들이는 세대의 교체—이 세 가지가 변화를 만들었다.

 

 


온실 속에 잠든 사람들


서울추모식물원은 부지 면적 3만 2천 제곱미터의 반구형 복합 온실이다. 입장료는 없다. 문은 연중 오전 여섯 시에 열린다.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가장 안쪽의 중앙 대온실은 연중 25도를 유지하는 열대·아열대 공간으로, NOR 전환 토양이 봉안된 공동 식재 구역이다. 이름 없는 거대한 나무들이 여러 이의 기억을 함께 품고 있다. 누구 한 사람의 나무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깃든 숲이다.


왼편의 사계절관은 가족이 지정한 나무·화분에 고인의 토양을 직접 사용한 공간이다.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 가족의 방문을 기다린다. 소파와 차 한 잔이 놓인 안락한 공간—화장장의 냉랭한 대기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오른편의 수생·정원관은 수련과 창포가 피어 있는 연못 구역이다. 말없이 앉아 있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는 유일한 공간이다. 음악도 없고, 안내 방송도 없다. 물 흐르는 소리와 팬 소리만 들린다.


상부의 고산·암석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야생화 이름을 배우고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는다. 선생님들은 이곳에서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자연의 순환으로 가르친다. 입구 쪽의 맞이관에는 카페와 안내 데스크, 그리고 사전 상담실이 있다. 방문객 모두에게 루이보스 차 한 잔이 무료로 제공된다.

 



은경은 오늘도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48세의 은경은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서울추모식물원을 찾는다. 어머니 최순희(1952~2041)가 NOR로 전환되어 이곳 사계절관의 산수유나무 아래 자리 잡은 지 3년째다.


오전 아홉 시, 입구의 안내 직원이 말한다. "어서오세요, 이은경 님. 오늘 산수유가 첫 꽃을 피웠어요." 추모식물원 앱에 등록된 나무의 개화 상태가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은경은 이미 어젯밤 알림을 받았다. 그것이 오늘 이곳에 온 이유다.


맞이관의 카페에서 루이보스 차 한 잔을 받아 들고 사계절관으로 향한다. 나무 앞에 서면, 가슴 높이의 작은 팻말이 보인다. 최순희 · 1952.4.7 – 2041.11.22 · "봄에 먼저 피는 꽃처럼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직접 골랐다고 했다. 유언장에 "나는 봄 꽃 피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썼다. 은경은 어머니가 정말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생각이 아직도 낯설다. 낯설지만 이상하게 따뜻하다.


열 시쯤 옆 구역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은평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생태 수업을 받으러 왔다. 선생님이 산수유 꽃잎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이 꽃은 어떤 할머니가 선택한 나무야. 할머니가 흙이 되어서 이 나무한테 밥을 줬거든."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꽃잎을 만진다. 은경은 그 장면을 보며 눈물이 날 뻔했다. 슬픔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수생관으로 자리를 옮기니 수련 연못 옆 긴 나무 의자에 칠순 남성이 눈을 감고 앉아 있다. 손에 낡은 사진 한 장을 쥐고 있다. 누가 봐도 방해해선 안 되는 사람의 얼굴이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는다. 직원도, 다른 방문객도.


돌아오는 길, 카페에서 은경은 낯선 40대 여성 옆자리에 앉게 된다. 어색한 침묵 뒤 여성이 먼저 말을 건다. "어느 쪽에 계세요?" 은경은 '사계절관'이라 답한다. "저도요. 우리 남편은 메타세쿼이아예요." 두 사람은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한다. 상실에 대해, 나무에 대해, 어쩌다 이 방식을 선택하게 됐는지에 대해. 헤어질 때 둘 다 연락처를 나눈다. 추모원이 만들어준 첫 번째 인연이다.

 

 


나무 한 그루마다 하나의 생애


2044년 현재 서울추모식물원에는 1,847종의 개별 봉안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 중 어느 것도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지 않다.


왕벚나무 — 김정숙(1945~2043). 딸 김미선은 말한다. "평생 봄을 기다리며 사셨어요. 벚꽃같이 화려하게 한 번 피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메타세쿼이아 — 박진호(1971~2043). 아내 이수정은 말한다.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요. 엔지니어였어요. 항상 위를 보는 사람이었거든요."


산수유 — 최순희(1952~2041). 딸 이은경은 말한다.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 되고 싶다 하셨어요. 정말 3월이면 제일 먼저 피어요."


맹종죽(대나무) — 임규현(1938~2042). 추모원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 최초의 NOR 선택자 중 한 분. 선구자답게 대나무를 고르셨습니다.


무궁화 — 오은지(1988~2042). 배우자는 말한다. "36세에 가셨어요. 질병과 오래 싸웠어요. 무궁화처럼 지지 않는 꽃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단풍나무 — 정해식(1955~2044). 아들은 말한다. "가장 화려한 계절에 지는 걸 선택했어요. 인생도 그렇게 사셨고요."

 

 


각자의 사유로 이곳에 온 사람들


주말 오전, 서울추모식물원에는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윤상태(74세)씨는 매주 온다. "아내가 저 메타세쿼이아예요. 45년을 같이 살았는데, 여기 오면 그냥…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이상하죠? 화분 앞에서 커피 마시고 신문 읽다가 가요.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해요."


김하은(31세)씨는 식물 도슨트 자원봉사자다. "저는 누가 여기 묻혀있지 않아요. 그냥 식물이 좋아서 시작했는데, 1년이 지나니까 봉안된 식물들의 이야기를 알게 됐어요. 그 이후로 이 일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죠."


박소영씨 가족 — 부부와 딸 유이(8세)는 처음 방문이다. 엄마가 말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배웠다고 꼭 와보고 싶다고 해서요. 처음엔 솔직히 좀 무서웠는데… 와보니까 그냥 진짜 예쁜 식물원이에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 줄 몰랐어요."


최재훈(22세)씨는 생태학 대학원생이다. "NOR 토양이 실제로 식물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측정하고 있어요. 같은 종의 벚나무라도 NOR 토양 봉안 여부에 따라 잎 색과 개화 시기가 다르게 나타나거든요."


이정숙(67세)씨는 사전 계약을 위해 왔다. "저도 NOR로 미리 계약해뒀어요. 오늘은 내가 어떤 나무가 될지 직접 골라보러 왔거든요. 손녀가 꽃 좋아하니까 봄에 환하게 피는 걸로 하려고요. 내가 죽고 나서도 얘가 봄마다 여기 소풍 오면 얼마나 좋아요."

 

 


빛과 물 사이에서, 끝과 시작 사이에서


오후 세 시, 온실의 유리 천장으로 봄 햇살이 기울어 들어온다. 중앙 대온실의 야자수 잎사귀들이 그 빛을 받아 바닥에 어른어른한 그림자를 그린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나비 한 마리가 화분 사이를 떠돌고 있다.


은경은 퇴장 게이트 앞에서 잠시 뒤를 돌아본다. 사계절관 쪽에서 아직도 윤상태 할아버지가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김하은 도슨트가 중학생 무리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다. 유이라는 아이가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엄마를 부르고 있다.


이곳은 묘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식물원도 아니다. 이곳은 죽음과 삶이 같은 시간대에 공존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가장 이상적인 추모시설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뿌리 아래에서, 꽃잎 끝에서,


봄날 온실에 스며드는 빛 속에서.

 

 

이 이야기는 2044년 봄을 상상한 픽션입니다. 천연유기환원법(NOR)  · 죽음이 끝이 아닌 순환이 되는 시대를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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