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는 어떻게 국민 제안을 무시하게 되는가
합법적 소진 구조의 해부
국민 제안 제도가 있다. 시민이 정책 아이디어를 행정기관에 제출하면 심사를 거쳐 채택 여부를 통보하는 제도다. 「국민 제안 규정」(대통령령)에 근거한다. 제도의 취지는 명확하다.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를 실제로 이용해본 시민이라면 한 가지 공통된 경험을 한다. 무언가가 계속 돌아오는데, 실질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 담당자의 불성실 때문만은 아니다. 구조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1단계. 기한 마지막 날의 불채택
국민신문고 정책제안의 처리 기한은 법령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불채택 통지는 기한 만료일 당일에 집중된다. 기한 내에 처리했으므로 법적으로 문제없다. 그러나 기한 마지막 날의 처리는 실질적 검토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더 주목할 것은 답변의 내용이다. 전혀 다른 주제의 제안들이 동일한 문구로 처리되는 경우가 있다.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며 향후 전문가 회의 등을 통해 검토하겠습니다."
이 문장은 어떤 제안에도 붙일 수 있다. 화장 인프라 개혁에도, 봉안시설 소비자 보호에도, 자연장 방법 개선에도. 제안의 내용을 읽지 않아도 쓸 수 있는 문장이다.
2단계. 재심사 요청과 기한 연장
불채택에 불복하면 재심사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재심사 요청이 접수되면 행정기관은 처리 기한 연장을 통보할 수 있다.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다. 합법이다.
한 달이 추가된다. 연장 사유는 대개 구체적이지 않다. 추가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흔적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연장 만료 후 돌아오는 답변은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민 입장에서는 한 달을 기다렸는데 같은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3단계. 정보공개 청구와 비공개 결정
심사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려면 정보공개 청구를 해야 한다. 심사 의견서, 검토 보고서, 내부 결재 문서를 청구한다.
돌아오는 답변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비공개 결정이거나, 부존재 통보다.
비공개 결정의 근거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조항은 정보공개법 제9조 제1항 5호다. "의사결정 과정 또는 내부검토 과정에 있는 사항"이다. 그런데 이 조항은 검토가 진행 중인 사안에 적용된다. 이미 불채택 결정이 완료된 사안에 적용하는 것은 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부존재 통보는 더 간단하다. 해당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사 기록이 없다면 심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어느 쪽이든 시민은 확인할 수 없다.
4단계. 이의신청과 새로운 기한의 시작
정보공개 비공개 결정에 불복하면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이의신청 처리 기한이 새로 시작된다. 이의신청 결과에 불복하면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행정심판 처리 기한이 시작된다. 행정심판 결과에 불복하면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각 단계마다 수십 일에서 수개월이 소요된다. 각 단계마다 기한 연장이 가능하다. 전문적인 법률 지식 없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국민 제안 하나가 불채택된 것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행정심판까지 가는 시민은 거의 없다. 구조가 그것을 막는다.
5단계. 담당자 인사이동과 초기화
공무원 정기 인사이동은 통상 2월과 8월이다. 담당 사무관이 교체되면 후임자는 해당 사안의 맥락을 처음부터 파악해야 한다. 진행 중이던 민원과 제안은 인수인계 목록에 올라가지만, 문제의식까지 이전되지는 않는다.
수개월에 걸쳐 쌓아온 대응의 맥락이 한 번의 인사이동으로 희석된다. 새 담당자에게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한다. 시민의 에너지는 또 한 번 소진된다.
이 사이클이 반복되면 대부분의 시민은 포기한다. 그것이 이 구조의 결과다.
이 구조의 본질
각 단계를 개별적으로 보면 모두 합법이다. 기한 내 처리, 기한 연장, 비공개 결정, 이의신청 절차, 인사이동. 어느 하나도 위법이 아니다.
그러나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제안 → 복붙 불채택 → 재심사 기한 연장 → 동일한 결론 → 정보공개 비공개 또는 부존재 → 이의신청 기한 → 행정심판 기한 → 담당자 교체 → 초기화.
이 흐름의 끝에서 살아남는 시민은 드물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시민의 참여는 흡수되고 소진되고 무력화된다.
의도의 문제가 아니다. 각 단계의 담당자는 규정대로 처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규정대로 처리한 결과가 시민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무력화하는 구조를 만든다면, 그것은 제도 설계의 문제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불채택 사유의 구체적 명시 의무화다. "전문가 회의를 통해 검토하겠다"는 표현은 불채택 사유가 아니다. 타당성 결여인지, 기존 정책과 중복인지, 법적 장애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한다.
둘째, 제안심사위원회 운영의 실질화다. 「국민 제안 규정」이 의무화한 심사위원회가 실제로 구성·운영되어야 한다. 위원회 구성 현황과 심사 결과가 공개되어야 한다.
셋째, 심사 기록의 보존과 공개다. 심사 의견서와 내부 검토 결과는 결정이 완료된 이후 공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종결된 사안의 심사 기록을 내부검토 중인 사항으로 분류하는 것은 정보공개법의 취지에 반한다.
국민 제안 제도는 시민과 행정이 소통하는 공식 창구다. 그 창구가 실질적으로 막혀 있다면, 제도는 있되 기능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능 없는 제도는 시민의 신뢰를 소진시키는 장치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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