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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엔딩

사회, 회사, 개인

한국은 안전망, 일본은 회사, 유럽은 독립심 — 고립사의 뿌리는 다르다

 

 

자명(自明)
그는 자신의 죽음을 달력에 표시하지 않았다. 달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력이란 앞으로의 일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반지하의 창문은 지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어서, 행인들의 발목만 보였다. 겨울이면 발목들은 두꺼운 양말과 부츠를 신었고, 여름이면 샌들과 맨발이었다. 김순철은 오래전부터 발목만 보고도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401호 여자는 걸을 때 오른발을 약간 안쪽으로 틀었고, 편의점 알바 청년은 퇴근할 때 늘 끌리듯 걸었다. 하지만 그 발목들 중 어느 것도 그의 문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십이 넘어서 그는 자신의 삶을 자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그것은 후회와는 달랐다. 강물을 역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왜 강이 이 방향으로 흘렀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부산에서 상경한 것, 첫 직장에서 상사와 다툰 것,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둔 것, 세 번째 직장이 없었던 것. 결혼하지 않은 것—정확히는 결혼할 수 없었던 것, 혹은 결혼할 의지를 잃은 것. 어머니의 장례식에 늦게 도착한 것. 고향 친구들의 연락을 몇 차례 무시한 것. 무시하다 보니 연락이 끊긴 것.
강은 자연스럽게 흘렀다. 누가 막은 것도, 누가 판 것도 아니었다. 그냥 흘렀고, 여기까지 왔다.
그는 그것을 자명하다고 불렀다.
냉장고 안에는 두부 한 모와 간장이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두부를 잘라 간장에 찍어 먹었다. 요리라고 부를 수 없는 행위였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요리를 포기했다. 요리는 누군가를 위해 하거나, 적어도 내일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일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일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었다. 그것이 내일의 전부였다.
열두 월의 어느 날, 그는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슴 쪽에 돌덩이 같은 것이 얹힌 느낌이었다. 숨이 짧아졌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병원에 가야 하는가.
생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 가면 누군가에게 연락해야 하고, 연락할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다시 드러날 것이었다. 보호자 칸을 비워두는 것. 그 공백이 진료실 의자보다 더 불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그는 어차피, 라는 말을 자주 썼다—어차피 살아도 이 방이고, 죽어도 이 방이었다.
그는 담요를 좀 더 당겨 덮었다.
사흘 뒤 관리인이 문을 열었다. 월세가 밀렸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서 냄새가 났다. 관리인은 문틱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김순철은 담요를 덮은 채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다는 것이 표정이었다. 놀라지 않은 얼굴. 저항하지 않은 얼굴. 자명한 결말을 맞이한 사람의 얼굴.
구청에서 나온 담당자가 기록지를 작성했다. 연락 가능한 가족: 없음. 지인: 미확인. 사망 추정 시각과 발견 시각의 차이: 72시간.
그 72시간의 침묵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담당자는 기록지에 쓰지 않았다. 쓸 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봄이 되면 반지하 창문 너머로 발목들이 다시 지나갈 것이었다. 두꺼운 부츠 대신 운동화를 신고, 조금 더 가볍게.
그 발목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나갈 것이었다.
그것도 자명한 일이었다.


 

고립사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 일본, 서구 유럽 모두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현상처럼 보여도, 그 뿌리를 파고들면 나라마다 핵심 원인이 다르다. 표면은 비슷하지만 구조가 다르다는 말이다.


세 지역의 고립사를 하나의 핵심 원인으로 압축해보면 이렇다.


한국 — 사회 안전망의 부재


일본 — 회사 공동체의 붕괴


서구 유럽 — 복지국가적 개인주의

 

 

한국, 위기의 순간에 손 내밀 곳이 없다


한국의 고립사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하나다. 삶이 무너지는 순간, 도움받을 곳이 없다는 것.


보건복지부 조사에서 국민들이 고립사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꼽은 답이 "삶의 위기 상황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의 부족"이었다. 국민 스스로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2023년 기준 19세 이상 성인 3명 중 1명이 도움이 필요해도 도움받을 곳이 없는 상태였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의 문제다.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급격한 근대화를 겪었다. 전통적으로 가족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구조였는데, 핵가족화와 도시화가 그 망을 해체했다. 그런데 가족이 빠진 자리를 국가 복지가 채우지 못했다. 가족도 없고 국가도 없는 그 공백 속에 고립사가 자란다.


고립사 사망자의 약 40%가 기초생활수급자다. 가난하고, 혼자이고, 도움받을 곳이 없다. 이 세 가지가 겹칠 때 고립사가 일어난다. 한국의 고립사는 복지의 실패다.

 


일본, 회사가 사라지면 사람도 사라진다


일본의 고립사를 이해하려면 일본 남성의 삶의 구조를 먼저 봐야 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직장 문화에서 회사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사회적 관계망 그 자체였다. 동료와 상사가 친구였고, 회사 행사가 사교의 전부였으며, 정체성도 직함으로 형성됐다. 일본 남성 다수가 평생 이 구조 안에서 살았다.


문제는 그 구조가 무너졌을 때다. 1990년대 버블 경제가 붕괴하면서 대규모 실업과 조기 퇴직이 쏟아졌다. 회사를 잃은 남성들은 연결망도 함께 잃었다. 은퇴 후에도 마찬가지다. 40년을 회사에 바쳤지만, 퇴직 다음 날부터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다. 일본 고립사 피해자의 80% 이상이 남성이고, 연간 7만 건 이상 발생하는 배경에는 이 구조가 있다.


여기에 문화적 요인이 더해진다. 일본 사회에는 '가만(我慢)'이라는 규범이 있다. 힘들어도 드러내지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묵묵히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태도다. 고통스러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렇게 혼자 버티다가, 혼자 죽는다. 일본의 고립사는 공동체의 실패, 특히 남성 공동체의 실패다.

 


서구 유럽, 혼자 살기로 선택한 사회의 대가


서구 유럽, 특히 북유럽의 고립사는 결이 다르다. 빈곤이나 안전망 부족이 주된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풍요롭고 복지도 탄탄한 사회에서 일어난다.


핵심은 개인주의다. 북유럽 복지국가는 개인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국가가 생존을 책임지기 때문에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 살아도 불편함이 없다. 스톡홀름 성인의 60%가 혼자 산다. 이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국가가 생존은 책임져도 관계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계는 개인이 스스로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복지국가적 독립성이 오래 지속되면, 어느 순간 관계를 만드는 능력 자체가 약해진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이 미덕이 되고, 연락을 먼저 하는 것이 어색해진다. 30년 전 스웨덴 장례식의 평균 참석자는 49명이었다. 지금은 24명이다. 스톡홀름에서는 사망자 10명 중 1명이 장례식에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안장된다.


서구 유럽의 고립사는 빈곤이나 방치의 결과가 아니다. 너무 잘 설계된 개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역설이다.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보이는 것


한국은 안전망이 없어서, 일본은 공동체가 무너져서, 유럽은 개인주의가 지나쳐서 고립사가 일어난다. 원인의 방향이 다르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세 지역 모두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이 중장년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50·60대 남성, 일본의 퇴직 남성, 유럽의 배우자를 잃은 노년 남성. 이들은 공통적으로 사회적 연결망을 스스로 만들고 유지하는 능력이 낮고, 도움을 청하는 데 높은 심리적 장벽을 가지고 있다.


사회 구조는 달라도, 그 구조의 틈새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사람은 비슷하다.


고립사를 막으려면 각 나라의 핵심 원인을 정확히 봐야 한다. 한국에 북유럽식 개인주의 캠페인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일본에 한국식 안전망 처방만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립사는 보편적 현상이지만, 해법은 각 사회의 구조적 맥락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세 지역 모두가 인정하는 한 가지가 있다. 고립사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 사회가 어느 순간 누군가의 연결을 놓아버린 결과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