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평생 불을 다루었다.
향로의 불, 촛불, 마음속 번뇌를 태우던 내면의 불. 그러다 마지막엔 불이 스님을 다룬다. 이것을 다비(茶毘)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자비(jhāpita)에서 왔다. 태운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뜻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비는 소멸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이다.

장작이 쌓인다.
제자들의 손이 나무를 올린다. 스승의 몸을 눕힌 다비탑 아래로, 마른 소나무와 향나무가 층층이 쌓인다. 살아 있을 때 스승은 말했다. 몸은 빌린 것이다. 돌려줄 때가 되면 깨끗이 돌려주어라. 제자들은 그 말을 손으로 실행한다. 나무를 쌓는 일은 기도다.
불이 붙는다.
처음엔 낮고 조심스럽게, 이내 높고 뜨겁게. 연기가 오른다. 흰 연기는 산을 오르고, 하늘을 오르고,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곳으로 오른다. 구경꾼도 없고 배웅꾼도 없다. 모두가 합장한 채 서 있다. 불꽃 앞에서 인간은 다시 작아진다. 그 작아짐이 예의다.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이 거리마다 피어난다. 태어남을 축하하는 불빛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다비의 불꽃을 먼저 생각한다. 오는 것과 가는 것이 같은 불빛으로 빛난다는 것을. 연등 하나하나가 어쩌면 누군가의 다비이기도 하다는 것을.
탄생과 소멸은 하나의 원이다.
스님의 몸은 재가 된다. 그 재는 땅에 뿌려지거나, 나무 아래 묻히거나, 바람에 실린다. 뼛조각에서 사리(舍利)가 나오기도 한다. 사리는 신비가 아니다. 평생을 연소한 사람에게만 남는 것, 잘 탄 삶의 흔적이다.

불은 거짓말을 못 한다.
화려한 관도, 비싼 수의도, 생전의 지위도 불 앞에선 모두 같은 속도로 탄다. 다비는 그래서 가장 정직한 장례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남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이 살아온 온도뿐이다.
스님은 평생 차갑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꽃도 뜨겁다.

오늘, 연등 불빛 아래서
한 번쯤 생각해도 좋겠다. 나는 어떤 불로 탈 것인가를. 다비는 스님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무언가로 돌아간다. 그 귀환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서 잘 타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타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가신 모든 분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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