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지동, 화장장을 받아들인 대가로 병원을 약속받았던 마을
서초구 원지동, 2003년의 거래
2001년, 서울시는 서초구 원지동을 새 화장시설 부지로 선정했다. 주민들은 즉각 반발했다. 건립 반대 소송이 이어졌고, 법정 분쟁은 6년을 끌었다.
이 갈등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하나의 거래였다. 2003년 서울시와 서초구 주민 대표, 청계산지키기운동본부는 협상 끝에 합의안을 발표했다. 화장로 11기 건립을 받아들이는 대신, 같은 부지에 국립의료원을 유치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시 복지여성국장은 이렇게 밝혔다. "원지동 추모공원 예정 부지에 국가중앙의료원을 조성하고, 의료단지 안에 화장장을 건립하겠다." 화장장이라는 기피시설을, 의료단지라는 반대급부로 감싸 지역에 내미는 방식이었다. 서울시는 이 사례를 새만금이나 부안 방폐장처럼 주민 반대를 힘으로 누르고 강행했던 과거 혐오시설 정책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갈등 해결의 모델이라고 자평했다.
주민들은 이 약속을 믿고 물러섰다. 2007년 소송이 종결됐고, 2011년 화장로 15기(정규 14기, 예비 1기)를 갖춘 서울추모공원이 준공됐다. 지금 서울시민 90% 이상이 화장을 거치는 이 도시에서, 이곳은 벽제화장터와 함께 가장 많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시설이 되었다.
병원은, 오지 않았다
화장장은 지어졌다. 병원은 지어지지 않았다.
2005년 보건복지부는 국립의료원을 특수법인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전환하고 신축·이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서울시와 국립의료원 간 신축 이전 협약이 체결됐고, 「국립중앙의료원법」까지 제정됐다. 2014년에는 보건복지부와 서울시가 을지로 부지 매각 대금으로 원지동 이전을 추진하고, 기존 부지에는 서울의료원 분원을 지어 도심 의료 공백을 막겠다는 업무협약까지 체결했다. 600병상, 사업비 4,395억 원, 2018년 완공 목표였다.
그러나 2015년 문화재 조사로 사업이 일시 중단됐고, 2016년 12월에야 원지동 부지 매매계약이 체결되며 계약금이 집행됐다. 이후 중앙감염병병원 추가 설치를 위한 부지 확보,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 도시관리계획 변경 절차가 이어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벽에 부딪혔다. 전략환경영향평가에서, 원지동 부지가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해 있어 심각한 소음 기준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이다. 방음벽을 설치해도 부지의 70% 이상을 활용할 수 없거나, 병원을 2층 이하로만 지어야 한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국가 중추 공공의료기관을 짓기에는 부지 자체가 부적합했던 것이다.
"화장장 옆에 병원을 짓자던 약속,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첫 단추"
2019년, 국립중앙의료원은 원지동 이전 사업 추진 자체를 공식 중단했다. 병원 관계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서울 강남과 분당에 인접한 의료공급 과잉 지역에, 경부고속도로와 화장장으로 둘러싸인 원지동 부지는 애초부터 국가 공공보건의료 중추기관의 입지로 적합하지 않았다고. 소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현 추진 방안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한 언론 보도는 이 사업의 시작 자체가 잘못됐다고 짚었다. 2003년 원지동 화장장 건립을 위한 주민 설득 방안으로 국립중앙의료원 이전이 이용되면서, 국가중앙병원 설립이라는 원래 취지는 퇴색되고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는 것이다. 2003년 합의 이후 16년, 이 사업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병원 측의 중단 선언에도 보건복지부는 "백지화가 결정된 바 없다"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했고, 서울시 역시 원지동 이전이 원칙이라는 방침을 고수했다. 병원의 전담 조직 해체와 정부 부처의 상반된 입장이 맞서며, 사업은 장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반전, 그리고 새로운 부지
이 교착을 깬 것은 뜻밖에도 팬데믹이었다. 2020년 초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국가 공공의료체계의 중추인 국립중앙의료원의 노후 시설을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커졌다.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 감염병 대응역량을 높이기 위해 최단 기간 안에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이 추진될 수 있도록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며, 원지동이 아닌 서울 중구 방산동(옛 주한미군 공병단 부지)으로 이전지를 바꾸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방산동 부지는 용산기지 반환 절차에 따라 국방부로 반환될 예정이었고, 기존 의료원 부지보다 약 1.5배 넓었다. 현 위치와 인접해 이전 부담이 적고, 주거지역이 많지 않아 주민 반발 우려도 낮았으며, 무엇보다 원지동의 발목을 잡았던 고속도로 소음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2020년 7월 1일, 보건복지부·서울시·국립중앙의료원 3자는 방산동 이전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하 4층·지상 15층, 총 776병상(일반 526·음압 150·외상 100) 규모의 국립중앙의료원 및 중앙감염병병원 건립 계획을 담은 도시관리계획 변경안이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결국 원지동을 떠났다.
16년 뒤, 남겨진 것
2003년 화장장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병원을 약속받았던 원지동 주민들에게,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가.
화장장은 예정대로 지어져 15기의 화장로가 매일 가동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약속했던 병원은, 16년의 표류 끝에 다른 동네로 가버렸다. 2016년 매매계약까지 체결되며 실현 직전까지 갔던 약속이 소음 문제라는 기술적 장벽 앞에서 무너졌고,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계획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발표된 바 없다.
원지동 부지 자체가 지금 누구의 소유로, 어떤 용도로 남아 있는지는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공개된 자료로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2016년 체결된 매매계약이 방산동 전환 이후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계약금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부지가 국립중앙의료원 소유로 남았는지 서울시로 환수되었는지-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이야기의 다음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빈 땅에 무엇을 지을 것인가
행정은 화장장 부지 옆에 병원을 짓겠다는 약속으로 갈등을 봉합했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병원은 떠났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 이미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로 합의한 이 마을에, 이제 무엇을 지어야 하는가.
전문 안치센터는 그 답이 될 수 있다. 병원과 달리 정온한 진료 환경이나 대규모 부지,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지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국립중앙의료원에는 치명적 결함이었던 조건들(고속도로 소음, 화장장과의 인접성)이 안치센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16년째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자리를 다른 공공 기반시설로나마 채우는 것은,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깨진 약속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이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파크골프장
국립중앙의료원이 방산동으로 떠난 뒤, 서울시는 이 부지를 그냥 두지 않았다. 2022년 5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국립중앙의료원과는 별개로 서울시 자체 사업인 '서울형 공공병원(가칭)'을 이 자리에 짓겠다고 발표했다. 4,000억 원을 투입해 600병상 규모, 연면적 약 9만 2천㎡의 종합병원을 세워, 평시에는 동남권 시민을 위한 공공의료를, 유사시에는 재난대응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기겠다는 구상이었다.
이 계획마저 좌초됐다. 서울형 공공병원 건립 사업은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문턱을 넘지 못하고 제동이 걸렸다. 한 의료 전문지는 이를 두고 "길 잃은 오세훈표 공공의료"라고 썼다.그리고 지금, 이 부지 일부에는 병원 대신 파크골프장이 들어서고 있다. 원지동 77번지 일원, 서울형 공공병원 건립 지연으로 방치되어 있던 땅에 약 30억 원을 투입해 9홀 규모의 파크골프장과 클럽하우스, 주차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이 2025년 행정안전부 중앙투자심사를 조건부로 통과했다. 이르면 2026년 3월 착공, 9월 운영 개시가 목표다.
화장장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병원을 약속받았던 땅에, 이제 두 번째 병원 계획마저 무너졌고, 그 자리는 파크골프장으로 채워지고 있다. 생명을 위한 시설은 두 번 좌절됐고, 죽음을 위한 시설(화장장)은 처음 계획대로 지어졌으며, 그 사이 남은 땅은 여가시설이 채우고 있다. 무엇이 우선순위였는지, 이 부지의 20년은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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