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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된 권리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된 권리

 

2018년, 한국에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10년이 넘는 사회적 논의 끝에 만들어진 법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원하지 않는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한다고 했다. 그 권리를 행사하는 도구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서식을 들여다보면 질문이 생긴다. 이것이 정말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설계된 것인가.

 

개별 선택이 사라졌다

 

초기 서식에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네 가지 연명의료를 각각 독립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인공호흡기는 거부하되 투석은 허용하는 식으로 본인의 의사를 세밀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지금 서식에는 그 선택란이 없다. 대신 하단에 문장 하나가 있다. 임종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경우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 문장에 서명하는 것이 전부다.

 

전부 거부하든지, 아니면 이 서식을 쓰지 않든지. 본인의 의사를 세분화할 방법이 없다. 서식이 간소화된 것이 아니다. 환자가 의료진의 판단을 제약할 수 있는 수단이 제거된 것이다.

 

적용 범위가 극히 좁다

 

서식 뒷면 유의사항 5번을 보면 이 서식이 언제 작동하는지 명시되어 있다.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이 모두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라고 판단한 경우에만 이행될 수 있다.

 

임종과정은 일반적으로 수시간에서 수일 내 사망이 예상되는 상태를 말한다. 암 말기 환자라도, 수개월을 버텨온 환자라도, 이 판단을 받기 전까지는 서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연명의료가 가장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간, 즉 말기이지만 아직 임종과정이 아닌 그 기간 전체가 이 서식의 보호 밖에 있다.

 

여기에 의사 두 명의 동의 조건이 더해진다. 담당의사 한 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의 한 명이 더 동의해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판단을 보류하면 서식이 있어도 연명의료는 계속된다.

 

왜 이렇게 설계되었는가

 

단순한 입법 미숙으로 보기 어렵다.

 

의료계 입장에서 연명의료 중단은 법적 책임의 문제다. 환자의 거부 의사가 넓게 인정될수록 의료진이 치료를 멈춰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커진다. 좁은 적용 범위와 두 명의 의사 동의 요건은 의료진을 보호하는 장치다. 환자의 권리보다 의료진의 안전이 먼저 설계에 반영됐다.

 

개별 선택란의 삭제도 같은 맥락이다. 세분화된 선택지는 의료진의 재량을 제약한다. 포괄 동의로 바꾸면 의료 현장에서 의사의 판단 공간이 넓어진다. 환자가 모든 연명의료를 일괄 거부한 것인지, 특정 처치만 거부한 것인지 불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법의 입법 목표 자체를 되짚어야 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핵심 질문은 어떻게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어떻게 연명의료 중단을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 허용할 것인가였다. 권리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설계의 논리는 통제다.

 

권리처럼 보이지만 작동하지 않는 권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존재한다. 법적 근거도 있다. 등록 절차도 있다. 그래서 한국은 임종기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나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서식이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을 따라가면, 보장되는 것이 얼마나 좁은지 보인다. 죽음이 며칠 안으로 예상되고, 두 명의 의사가 동의하고,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이 서식은 효력을 발휘한다. 그 이전의 긴 시간, 연명의료가 시작되고 축적되고 되돌리기 어려워지는 그 시간 전체는 여전히 시스템의 기본값이 지배한다.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된 권리는,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적용 범위를 임종과정에서 말기 환자 전반으로 확대해야 한다. 현행법은 수시간에서 수일 내 사망이 예상되는 상태에서만 서식이 작동한다. 암 말기 판정을 받은 시점,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시점부터 서식이 효력을 발휘해야 한다. 연명의료가 시작되기 전에 본인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의미가 있다. 이미 시작된 다음에 멈추는 것은 훨씬 어렵다.


둘째, 개별 항목 선택을 부활시켜야 한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는각각 다른 처치다. 인공호흡기는 거부하되 투석은 원할 수 있고, 항암제는 거부하되 심폐소생술은 원할 수 있다. 포괄 동의는 이 차이를 지운다. 본인의 의사를 세밀하게 기록할 수 있어야 자기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 의사 두 명 동의 요건을 재설계해야 한다. 현행 요건을 담당의사 한 명으로 줄이되, 환자 측이 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방향이다. 환자 또는 가족이 이의를 제기하면 제3의 전문의 검토를 거치는 구조다. 지금은 의료진 두 명이 동의하지 않으면 환자의 거부 의사가 묵살된다. 이의제기 절차는 그 반대 방향, 즉 환자의 의사가 출발점이 되는 구조를 만든다.


해외는 어떻게 하는가


대만은 2019년 병인자주권리법을 시행했다. 적용 대상이 임종과정 환자에 한정되지 않는다말기 환자, 불가역적 혼수상태, 영구적 식물인간 상태, 극도의 치매, 그리고 정부가 고시하는 기타 중증 질환까지 포함한다. 본인이 원하는 의료와 원하지 않는 의료를 모두 구체적으로 지정할 수 있으며, 의료위임대리인을 지정해 자신의 의사를 대신 행사하게 할 수 있다. 의사 한 명의 확인으로 효력이 발생하고, 전문 상담사와의 사전 상담이 의무화되어 있다.


영국은 Lasting Power of Attorney 제도를 통해 건강과 복지에 관한 결정권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위임할 수 있다. 단순히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 어떤 치료를 받을지 전반에 걸쳐 대리인이 본인을 대신해 결정한다. 사망이 임박한 시점이 아니라, 판단 능력을 잃기 전에 미리 지정해두는 구조다.


공통점이 있다. 두 나라 모두 서식이 작동하는 조건을 환자 중심으로 설계했다. 의료진이 두 명 동의해야 한다거나, 임종과정이어야 한다거나 하는 조건이 없거나 훨씬 완화되어 있다. 출발점이 다르다. 한국의 서식은 의료 시스템이 멈추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을 규정한다. 대만과 영국의 제도는 환자의 의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규정한다.


같은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을 쓰지만, 설계가 다르면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다. 한국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진정한 자기결정권의 도구가 되려면, 조건의 언어가 아니라 권리의 언어로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