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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대차식 화장로를 숭배하는가

우리는 왜 대차식 화장로를 숭배하는가


일본의 대차식 화장로는 훌륭한 기술이다. 부정할 이유가 없다.

수골(拾骨) 의식을 위해 유골의 원형을 보존하겠다는 철학, 불길 하나하나의 방향과 온도를 수십 년에 걸쳐 정밀하게 제어해온 장인정신 — 그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그것이 탄생한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맥락을 무시하고 기술만 떼어다 이식하는 순간, 존중은 모방이 되고 모방은 부패한다.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대차식 화장로가 무엇인지부터 알자

대차식 화장로를 이해하려면 일본의 '수골(拾骨)'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화장이 끝난 후, 유가족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젓가락으로 유골을 직접 집어 올린다. 발끝부터 시작해 머리 쪽으로 올라가며, 마지막에는 목뼈를 담는다. 목뼈가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형상을 닮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행위를 일본에서는 '오코츠 히로이(お骨拾い)'라 부르며, 고인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가족이 함께 놓아주는 신성한 의례로 받아들인다.

이 의례가 가능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화장이 끝났을 때 유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의 형체 그대로 가지런히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대차식 화장로는 바로 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설계된 기술이다. 시신을 실은 대차가 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전 과정에서 진동과 충격을 최소화하고, 불꽃이 유골을 직접 때리지 않도록 연소 흐름을 극도로 정밀하게 제어한다. 기술이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문화가 기술을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솔직하게 물어야 한다.

오코츠 히로이, 그 의례적 긴장감이 지금 한국의 화장 절차 안에 존재하는가. 화장이 끝난 후 유가족이 직접 유골을 수습하는 장면이 이 나라 화장장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유골의 원형 보존이라는 가치가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 핵심 의례로 자리 잡고 있는가.

대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기술을 그대로 들여왔는가. 그리고 왜 수십 년째 그것을 표준으로 유지하고 있는가.


전문가들은 몰랐는가

대차식 화장로의 구조적 한계는 조금만 들여다봐도 누구나 알 수 있다.

대차와 화장로 본체 사이의 구조적 틈새로 미연소 배출가스가 새어나간다. 전실 등의 공간 효율 문제가 있다. 입·퇴로 과정에서 열손실이 발생한다. 화장 소요 시간이 길어진다. 에너지 효율이 낮다. 이 모든 것은 비용이고, 환경이고, 대기이고, 결국 유족이 감내해야 하는 불편과 고통으로 돌아온다.

화장 전문가들이 이것을 몰랐을까.

국가 예산으로, 협회 후원금으로 그렇게 많은 나라의 화장장을 돌아다니며 도대체 무엇을 보고 왔는가. 설비를 도입하고, 운영 기준을 만들고, 정책을 권고하는 위치에 서서 이 나라의 화장 인프라를 향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모르고 했다면 무능이다. 알고도 했다면 —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일본 설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공급망이 있다. 그 공급망에 결부된 이해관계가 있다. 수입 설비에 익숙해진 운영 관행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 상태를 바꾸지 않아도 아무도 문책하지 않는 구조가 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떠안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 유족이기 때문이다. 화장이 끝나고 청구서를 받는 것도, 매캐한 연기가 걷히지 않은 대기를 마시는 것도, 비효율 시설의 유지비를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도 — 전부 시민이다.

전문가가 침묵하는 자리에서 공공 화장장은 비효율을 반복하고, 유족은 그 비용을 부담하며, 정책은 검증되지 않은 관행을 계속 추인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순환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청구서를 받아들고 있다

화장 대란이다.

수도권 화장장 예약은 이미 며칠씩 밀려 있다. 가족이 떠났는데 화장을 못 한다. 장례식장 안치 비용이 하루하루 쌓인다. 지방 화장장을 수소문하고, 낯선 길을 몇 시간씩 달려가 타지에서 마지막을 치른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예약 전쟁부터 치러야 하는 것이, 지금 이 나라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현실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화장 수요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고령화 사회로의 이행은 수십 년 전부터 예고된 수순이었고, 화장률 상승 곡선은 누구나 볼 수 있는 통계였다. 화장장을 늘려야 한다는 것, 처리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 — 이것은 예언이 아니라 산술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화장 인프라는 그 산술을 외면했다. 효율이 낮은 설비를 표준으로 고착시킨 채 수십 년을 보냈다. 화장 1건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같은 시설에서 더 적은 수의 화장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스스로 선택해놓고, 수요가 폭발하자 시설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낭비의 문제다.

대차식 화장로 하나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일 화장 건수를 생각해보라. 입·퇴로 시간, 로 내부의 열 안정화에 걸리는 시간, 구조적 열손실로 인해 늘어나는 화장 소요 시간 — 이 모든 비효율이 쌓여서 한 기당 처리 건수를 갉아먹는다. 전국 화장장에 설치된 수백 기의 화장로가 조금 더 효율적이었다면, 지금 이 대란의 규모는 달라졌을 것이다. 확언할 수 있다.

그 선택을 주도하거나 묵인한 전문가들에게 묻는다. 예약이 밀려 영안실 냉장고에서 기다리는 고인 앞에서, 화장장을 찾아 타지를 헤매는 유족 앞에서, 당신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일본의 화장 기술을 배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술이 태어난 문화적 맥락과, 그 기술의 구조적 한계와, 그 기술이 한국의 현실에 맞는지를 스스로 검토하지 않고 — 그저 일본이 하니까, 일본이 앞서가니까, 일본 제품이니까 — 라는 논리로 도입을 반복해왔다면, 그것은 전문성이 아니다. 그것은 부역이다.

유골의 존엄을 입에 올리면서 정작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한 비판적 사고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 전문가라는 직함 뒤에 숨어 책임은 회피하고 이해관계는 챙겨온 사람들. 그들이 설계하고 방치한 화장 시스템 위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가족이 마지막 길을 보내고 있다. 아니, 마지막 길조차 제때 보내지 못하고 있다.

분노는 당연하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정당하다. 정당할 뿐 아니라 — 지금 이 분노가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글은 특정 기업이나 개인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간 누적된 구조적 문제와 그것을 방치한 집단적 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엔딩연구소는 한국의 화장 인프라가 시민의 존엄을 중심에 놓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