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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뉴스

삼베보다 오래 입은 옷

 

삼베보다 오래 입은 옷

 

양복을 입고 출근하고, 셔츠 차림으로 손님을 맞고, 주말이면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걷던 사람이 있다. 그렇게 팔십 년, 구십 년을 살아온 사람의 마지막 옷은 대개 정해져 있다. 흰 삼베 두루마기, 대님, 행전. 평생 입어본 적 없는 형태의 옷이다.

 

이상한 일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을, 정작 옷을 입은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입고 떠난다.

 

낯선 마지막

 

수의는 원래 이상한 옷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곧 평상시의 복식이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살다가, 두루마기를 입고 묻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속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한복을 명절에나 잠깐 꺼내 입는 옷으로 여긴다. 그런데 유독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평생 입지 않던 형태의 옷으로 돌아간다. 마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만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것을 전통이라 부를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전통이 정말 그 사람의 삶과 이어져 있는지는 다시 물어볼 만하다. 평생 슈트를 입던 사람, 평생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던 사람, 평생 작업복을 벗지 못했던 사람. 이들의 삶은 저마다 다른데, 마지막 옷은 하나로 같다.

 

옷은 그 사람의 시간이다

 

옷은 단순한 천이 아니다. 오래 입은 셔츠에는 그 사람의 체형이 배어 있고, 늘 신던 신발에는 걸음걸이의 습관이 남아 있다. 즐겨 매던 넥타이, 아끼던 카디건, 낡아서 해진 청바지 한 벌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래서 유족이 고인의 옷을 정리할 때 가장 오래 머뭇거리는 것도 옷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릿하다. 옷은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의 흔적을 가장 구체적으로 붙들고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옷을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벗겨내고, 평생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형태의 옷을 입힌다. 어쩌면 우리는 장례라는 절차 앞에서, 그 사람 개인의 시간을 지우고 모두를 같은 형식 안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형식과 사람 사이

 

물론 형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해진 절차는 유족이 슬픔 속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헤매지 않게 해준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마지막을 치른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형식이 사람보다 앞설 때, 장례는 고인을 기리는 자리가 아니라 절차를 완수하는 자리가 되어버린다. 삼베 수의 한 벌을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를 생각하면, 정작 그 옷이 고인을 얼마나 닮아 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질문을 조금 바꿔볼 수 있을 것이다. 꼭 삼베여야 하는가. 꼭 조선시대의 형태를 갖춰야 하는가. 화장이 대부분인 지금, 태워도 무방한 천이라면, 그것이 고인이 평생 입던 셔츠여도, 아끼던 코트여도 되지 않을까.

 

결국 다시 옷 이야기

 

그래서 다시 셔츠 이야기로 돌아온다. 양복을 입고 살던 사람이라면 양복 한 벌로, 매일 앞치마를 두르던 사람이라면 그 앞치마 자락 하나라도 함께. 완전히 새로운 옷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걸치고 살았던 옷의 일부라도 마지막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거창한 의식일 필요는 없다. 수의 위에 고인이 좋아하던 셔츠를 한 겹 덧입히는 것, 아끼던 스카프를 관 위에 올려두는 것. 작은 변화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지막 옷이 꼭 낯설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 그대로, 익숙한 옷을 입고 떠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더 진짜에 가까운 배웅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