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비에서 마주친 이름들
몇 해 전 서울의 한 대형병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용무를 마치고 로비를 지나던 중,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병원 지하 입구, 장례식장으로 이어지는 통로 위에 걸린 전광판 때문이었다.
전광판에는 고인의 이름과 빈소 번호가 순서대로 돌아가며 표시되고 있었다. 1호, 3호, 7호… 마치 공항의 탑승구 안내판이나 대형 예식장의 홀 배정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위에 떠 있는 것이 탑승객의 이름이 아니라 방금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름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 장면은 낯설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일본에서는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여러 건의 장례식이 동시에 치러지는 일이 없다. 장례는 각각 별도의 회관이나 전용 예식장에서, 한 번에 한 건씩, 독립적인 시공간 속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하나의 건물, 하나의 로비를 여러 상가(喪家)가 공유하며, 조문객들은 전광판의 번호를 보고서야 자신이 찾아온 빈소를 확인한다.
"병원 안에 장례식장이 있다"는 것
애초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전광판이기 이전에, 병원 내부에 장례식장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는 대형병원이 장례식장을 직영으로 운영하는 것이 지극히 통상적인 일이라고 들었다. 치료의 공간과 애도의 공간이 같은 건물, 같은 경영 주체 아래 있다는 것.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구조다. 일본의 병원 영안실은 철저히 임시 안치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지하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자리할 뿐이다. 그곳에서 장례식이 치러지는 일은 없다. 고인은 영안실에서 잠시 머문 뒤, 반드시 병원 밖의 장의사나 전용 회관으로 옮겨진다. 궁형(宮型) 영구차가 시내를 지나가는 것만으로 "조짐이 나쁘다"는 항의를 받아 점차 자취를 감춘 나라가 일본이다. 죽음의 흔적을 가능한 한 일상의 시야 밖으로 밀어내려는 감각이 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런데 한국은 다르다. 이 문화적 금기가 상대적으로 옅은 대신, 병원과 장례식장의 결합이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것처럼 보였다.
회전율이라는 논리
취재를 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 병원 장례식장의 빈소는 대개 3일장을 기준으로 순환한다. 한 상가가 빈소를 비우면 그날 안에 다음 상가가 그 자리를 채운다. 전광판이 실시간으로 번호를 갱신하는 것은 바로 이 회전 구조 때문이다.
한국의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병원 입장에서는 빈소 회전율이 곧 수익률"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의료수가는 정부가 통제하지만, 장례식장 이용료와 음식·장례용품에 붙는 마진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방의 중소병원일수록 장례식장 수익이 병원 운영자금의 상당 부분을 메워주는 구조가 흔하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다시 그 전광판을 떠올려보니,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것이 보였다. 빈소 번호가 돌아가는 그 화면은 단순한 안내판이 아니라, 애도라는 개인적이고 고유한 시간이 산업적 회전율의 논리 위에서 관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유족에게는 편리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쁜 일인가.
한국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은 오히려 이 구조의 순기능을 이야기했다. 갑작스러운 사망 앞에서 유족이 한밤중에 장례식장을 새로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 병원 안에서 임종과 장례가 이어지니 동선이 짧고, 지방에 따라서는 별도의 장례 인프라 자체가 부족한 곳도 있어 병원이 그 공백을 메워준다는 것이었다.
일본인인 나에게도 이 논리는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이 "편리함"이라는 말 안에는 미묘한 함정이 숨어 있다. 임종 직후의 유족에게는 다른 장례식장을 알아볼 시간도, 여러 곳을 비교할 정보도 없다. 눈앞에 있는 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결과가 사후적으로 "편리했다"고 회고되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라기보다, 선택지가 애초에 제한된 상태에서 발생하는 수용에 가깝다.
한국의 한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사망 선고 직후의 유족은 장례식장을 비교하거나 선택할 여유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병원에서 안내받는 절차를 그대로 따르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를 활용할 수 없는 시간에 있다는 설명이었다.
전광판이 남긴 질문
처음에는 전광판이 낯설었다. 그러나 취재를 마친 뒤에는 낯선 것이 전광판이 아니라, 그 전광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소 번호는 효율을 위해 끊임없이 갱신된다. 하지만 유족에게 애도의 시간은 번호처럼 쉽게 교체되지 않는다.
서울의 병원 로비에서 보았던 이름들은 이미 모두 전광판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화면이 내게 남긴 질문만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죽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과,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는 일은 과연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이 글은 일본 잡지 『나무』에 게재된 「한국의 장례식장」 관련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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