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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엔딩

병원과 장례식장: 분리되어야 할 두 세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풍경

병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1층은 외래, 지하 1층은 장례식장. 이 안내판을 처음 본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워한다. 미국도, 독일도, 일본도, 어느 선진국의 병원에도 이런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병원이 장례식장을 직접 운영하는 나라는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이상하게 느끼지 못할 뿐,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형적 구조다.

 

이것이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라면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의료 윤리의 근본을 훼손하고, 환자와 유족의 취약함을 착취하며, 병원이라는 공공적 신뢰를 사적 이윤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한국 사회의 수많은 적폐 중에서도, 병원의 장례식장 운영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뿌리 깊은 적폐 중 하나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배신

의사들은 의사 면허를 취득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 그 핵심은 명료하다.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해를 끼치지 않는다." 병원이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순간, 이 선서는 구조적으로 위반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병원이 장례식장을 운영하면, 병원은 환자의 죽음으로부터 수익을 얻는 기관이 된다. 환자가 살면 진료비 수익, 환자가 죽으면 장례식장 수익 — 이 구조 안에서 병원은 어느 쪽이든 이익을 취한다. 이것이 과연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관의 모습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 이다. 연명 치료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임종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이 결정들이 병원 경영진의 재정적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과연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제도적으로 이 두 가지가 같은 지붕 아래 공존하는 한, 의혹의 여지는 영원히 남는다.

 

의료 윤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의료와 상업의 경계 붕괴" 로 규정해왔다.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과 그 환자의 죽음을 상품화하는 사람이 동일한 법인이라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취약한 순간을 노리는 구조적 착취

병원 장례식장이 유독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이유를 업계는 '접근성'과 '편의성'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훨씬 노골적이다. 유족이 가장 취약한 순간을 포획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 자식들은 극도의 충격과 슬픔 속에 있다. 이 상태에서 냉정하게 여러 장례식장을 비교하고, 가격을 흥정하고, 합리적 소비자로서 선택을 내리는 것은 심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병원 장례식장은 바로 이 순간을 노린다. 원무과 직원의 안내, 의료사회복지사의 '도움', 장례식장 연결 — 이 과정은 유족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완결된다.

 

이것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이다. 소비자단체 조사에 따르면 병원 부속 장례식장의 동일 서비스 가격은 독립 장례식장 대비 평균 20~40% 높다.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유족에게 40% 프리미엄을 당연하게 청구하는 이 구조를 '편의 서비스'라고 부를 수 있는가.

 

2015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일부 병원 장례식장의 끼워팔기와 가격 불투명 관행에 시정 조치를 내렸음에도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법적 제재 이후에도 병원들은 장례식장 사업을 오히려 확장했다. 규제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해체하지 않은 것이 실패다.


비영리의 탈을 쓴 이윤 추구

한국의 주요 대학병원들은 법적으로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설립 취지는 공중 보건 향상과 의료 공익 서비스 제공이다. 그런데 이 비영리 법인들이 장례식장으로 연간 수백억 원의 수익을 올린다. 일부 대형 병원의 장례식장 매출은 병원 전체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비영리 병원이 장례 사업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가. 면세 혜택을 받고, 공익 기관으로 사회적 신뢰를 누리면서, 그 신뢰를 장례 사업의 영업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것은 공익의 외피를 두른 사익 추구다.

 

더 나아가 이 수익 구조는 의료계 내부의 왜곡된 인센티브를 강화한다. 장례식장 수익이 병원 운영비를 보전한다는 논리는, 결국 병원이 환자를 잃는 것을 재정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든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병원의 사명이라면, 그 사명은 죽음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구조와 공존할 수 없다.


왜 한국에만 이런 구조가 생겼나

80~90년대 자신의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를 객사로 여겨, 영안실 옆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르던 것이 시발점이 되었고, 이와 더불어 급격한 도시화, 핵가족화로 인해 가정 내 장례 공간이 사라졌으며, 국가는 공공 장례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지 않았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병원이 대신하면서, 병원은 그 자리에서 수익을 취했다. 공공 장례 시설의 부재, 독립 장례업 육성 정책의 실패, 장례 서비스 시장에 대한 무관심 — 이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병원이 나쁜 것만이 아니다. 국가가 방치한 공간을 병원이 채운 것이고, 그 구조를 수십 년째 방치한 것이 더 큰 문제다.

 

어느 나라도 이 길을 따르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의 병원들은 임종 이후 시신을 독립된 장의사(funeral home)에 인계한다. 병원과 장례 서비스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다. 이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다. 한국만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분리는 선택이 아닌 당위다

병원과 장례식장의 분리는 당위의 문제이지, 편의나 경제성의 문제가 아니다. 반론으로 제기되는 논리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접근성이 좋다" — 접근성은 공공 장례 시설 확충으로 해결할 문제다. 취약한 유족을 효율적으로 포획하는 것을 접근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의 남용이다.

 

"장례식장 수익이 의료비를 낮춘다" — 이 논리라면 병원이 장례용품 쇼핑몰을, 상조회사를, 납골당을 운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의료비 문제는 의료 수가 현실화와 공공 의료 강화로 해결해야 할 문제지, 죽음의 상품화로 보전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유족이 원해서 이용한다" —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을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공정한 경쟁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유족의 선택은 달라질 것이다.

 

분리의 방향은 명확하다. 의료법을 개정해 병원의 장례식장 신규 허가를 금지하고, 기존 병원 부속 장례식장은 단계적으로 법인 분리를 의무화해야 한다. 동시에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공공 장례 시설을 확충하고, 독립 장례업에 대한 공정한 진입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죽음도 존엄하게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존엄이다. 그 존엄은 슬픔에 빠진 유족이 병원 로비에서 장례식장 직원에게 안내받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구조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무감각이 진짜 문제다.

 

병원은 생명을 살리는 곳이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어야 한다. 죽음을 관리하는 것은 병원의 사명이 아니다. 이 두 역할이 하나의 기관 안에서 공존하는 한, 한국의 의료는 히포크라테스가 아닌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병원과 장례식장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의료 윤리의 요청이고, 소비자 권리의 요청이며, 인간 존엄의 요청이다. 더 이상 이 문제를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적폐는 익숙해진다고 적폐가 아닌 것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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