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석은 평생을 바친 회사의 은퇴식을 마치고 돌아왔다. 텅 빈 거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제 내 인생은 누가 지휘하지?" 문득 거울 속 낯선 중년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며칠 후, 딸 지우가 갈색 표지의 깔끔한 노트를 내밀었다. "아빠, 이거 요즘 유행이래. 한번 써봐." 표지에는 『엔딩노트』라고 적혀 있었다. 민석은 코방귀를 꼈다. "엔딩노트? 죽을 준비나 하라는 거야? 난 아직 짱짱해!" 노트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며칠 뒤 서랍을 정리하다 다시 노트를 발견했다. 마지못해 첫 페이지를 펼쳤다.
[1부. 일상의 유지]. '내가 당장 쓰러지면 내 넷플릭스 계정은 누가 해지하지?' 민석은 가벼운 마음으로 칸을 채워나갔다.
휴대폰 비밀번호: (지우 생일)
주거래 은행 앱 비밀번호: ******
정기 결제: 넷플릭스, 유튜브 프리미엄, 렌탈 공기청정기, 자동차 보험료...
칸을 채울수록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건 죽음 준비가 아니라, 내 일상의 '백업'이구나.' 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펜을 꽉 쥐었다.
다음 장은 [2부. 자산의 지도]. 민석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가족도 모르는 비상금 계좌와 몆 년 전 재미 삼아 샀던 코인 지갑의 존재를 적었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항목, 친구 보증을 섰던 대출 내역도 명확히 기재했다.
'지우가 나중에 이 빚 때문에 고생하면 안 되지.'
가장 구석에 있던 항목을 발견했다. [보물과 쓰레기의 구분]. 민석은 웃음이 터졌다. 자신이 아끼는 빈티지 카메라들과 낚시 장비들을 적고, 그 가치와 처분 방법을 적었다. "이 카메라들은 김 부장에게, 낚싯대는 사촌 형님에게." 내 소중한 물건들이 쓰레기 취급받지 않을 거란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3부. 존엄과 결정권]. 이 부분은 민석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타인의 판단에 의해 휘둘리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연명의료 결정: '무의미한 연명치료 거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완료)
장례 지침: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장례식장에서는 내가 좋아했던 올드 팝송을 틀어줄 것.'
삭제 리스트: '침대 밑 박스는 절대 열지 말고 태워달라.'
이 페이지를 작성하며 민석은 진정한 '지휘권'을 느꼈다. 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결정한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품위 있는 마무리였다.
[4부. 관계의 마침표]. 서먹했던 딸 지우에게 마음을 전할 차례였다. "지우야, 아빠가 무뚝뚝해서 미안했어. 넌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였어."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한 줄을 적었다.
나의 묘비명 : "최선을 다해 내 인생을 지휘했다. 이제 편히 쉬련다."
노트를 덮는 순간, 민석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더 이상 거실의 시계 소리는 소음이 아니었다.
몇 년 후, 지우는 서랍 속에서 민석의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는 닳아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 이후에도 새로운 버킷리스트와 여행 기록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빠는 마지막까지 멋진 지휘자였네요."
지우는 눈물을 닦으며 아버지가 좋아했던 올드 팝송을 틀었다. 민석이 남긴 엔딩노트는 끝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에게 전하는 새로운 삶의 교향곡이었다.
엔딩노트는 감춰졌던 '삶의 지휘권'을 되찾아주고: '죽음' 대신 '삶의 통제'라는 긍정적인 가치를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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