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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엔딩

가족이 있는데도 혼자 떠났다

 

'무연고 사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한 장면을 떠올린다. 가족도 자식도 없이 홀로 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노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올해 3월까지 용인특례시에서 치러진 공영장례 72건 가운데 54건은 가족이나 법적 연고자가 있었다. 전국적으로도 공영장례의 약 75%는 연고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포기한 경우다. 법은 이를 모두 '무연고 사망'으로 분류하지만, 이 숫자가 말하는 것은 가족의 부재가 아니다. 가족이 있어도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여기서 쉽게 "가족이 너무 각박해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다. 마지막 순간의 외면은 대개 그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이어진 갈등과 단절, 돌봄의 피로, 빈곤과 질병, 무너진 관계가 켜켜이 쌓인 끝에 도착한 종착역이다.

 

누군가는 장례비조차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고, 누군가는 수십 년간 연락조차 끊긴 부모나 자식의 죽음을 마주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남아 있지만,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경우도 적지 않다. 마지막에 시신을 인수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재단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무연고 장례의 증가는 도덕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위기를 보여주는 지표다.

 

우리는 오랫동안 돌봄과 부양, 그리고 죽음까지 가족의 책임이라고 믿어 왔다. 국가는 가족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만 보조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가족의 규모는 작아졌고, 1인 가구는 늘었으며, 경제적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부모를 부양할 자녀도, 형제를 돌볼 여력도, 마지막 장례를 책임질 경제적 기반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가족이 무너졌다기보다 가족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제도는 여전히 과거의 가족을 전제로 움직인다. 가족이 책임질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 위에 복지와 돌봄을 설계해 놓고, 그 믿음이 무너질 때마다 개인의 도덕성을 탓한다. 사회가 감당해야 할 부담을 가족에게만 떠넘긴 결과가 지금의 무연고 장례 증가라면, 그 책임 역시 사회가 함께 져야 한다.

 

더욱 씁쓸한 것은 마지막 존엄마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공영장례 지원 규모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여건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어떤 곳에서는 충분한 예우 속에 마지막 길을 배웅받지만, 어떤 곳에서는 몇 시간 만에 장례가 끝난다. 사람이 어디에서 생을 마감하느냐에 따라 존엄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현실은 국가가 외면해서는 안 될 불평등이다.

 

공영장례는 죽은 사람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래서 공영장례는 단순한 복지사업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어야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장례식장 밖에 있다.

 

왜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혼자가 되었는가.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만, 무연고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방치된 관계와 외면당한 삶, 제때 손을 내밀지 못한 사회가 마지막 순간에 '무연고'라는 이름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무연고 장례가 늘어나는 사회는 죽음이 많은 사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고립이 깊어진 사회다. 장례를 책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관계를 회복하고,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 죽음의 품격은 장례식장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사회에서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장례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의식이다. 동시에 그 사회의 수준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가족이 있는데도 홀로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면, 문제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에게 있다.

 

죽음은 마지막 순간에 사회를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 있는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왔는지, 아무 말 없이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