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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죽는 사회, 발견되지 않는 죽음

고독한 엔딩

by 다비코 2026. 9. 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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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죽음은 사회가 만든다
 
사람은 결국 혼자 죽는다. 가족이 곁에 있든, 친구가 손을 잡고 있든,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누구도 대신 건널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을 혼자 맞이하는 것과,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인간의 조건일 수 있다. 후자는 사회의 상태를 보여준다.
 
집 안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간. 우편물이 쌓이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휴대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는데도 확인하는 사람이 없는 시간. 그 시간은 단순히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의 공백이 아니다. 한 사람이 사회적 관계와 행정의 시야에서 동시에 사라졌다는 증거다.
 
그래서 고립사는 죽음의 방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고립됐고, 그 고립을 어느 단계에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는지를 묻는 사회적 사건이다.
 
고립사는 '혼자 사는 사람'의 동의어가 아니다
 
현행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은 이른바 '고립사'(법률상 용어로는 고독사)를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사회적 고립 상태로 생활하던 사람이 자살·병사 등으로 임종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법이 강조하는 것은 혼자 사는 주거 형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단절과 사회적 고립이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혼자 살아도 매일 연락하는 사람이 있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이웃이 있고, 병원과 일터와 지역공동체에 연결돼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고립사 위험에 놓였다고 볼 수 없다. 반대로 가족과 같은 집에 살더라도 경제적·정서적으로 완전히 고립돼 있다면 위험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정책 현장에서는 여전히 '독거노인'이나 '1인 가구'가 위험을 가늠하는 가장 쉬운 표지로 사용된다. 혼자 산다는 사실은 파악하기 쉽지만, 관계가 끊겼다는 사실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에는 주소가 남지만, 누가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지, 아플 때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지, 실직했을 때 어디로 가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행정은 사람의 관계보다 사람의 자격을 더 잘 관리한다. 기초생활수급자인지, 장애인인지, 노인인지, 임차인인지, 어떤 복지서비스를 이용하는지는 데이터로 남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는 사람인지, 연락을 받아도 문을 열 수 없는 상태인지,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식사를 한 날이 언제인지는 행정의 기본 항목이 아니다.
 
고립사는 바로 그 기록되지 않는 영역에서 시작된다.
 

 
숫자는 다시 늘었다
 
보건복지부의 「2024년 고독사 사망자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고립사 사망자는 2022년 3,559명, 2023년 3,661명이었다. 전체 사망자 100명당 고립사 사망자는 2023년 1.04명으로, 2021년 1.06명보다 소폭 낮았다. 발표 당시 보건복지부는 이 소폭 하락을 2021년 법 시행 이후 누적된 예방 정책의 성과로 설명했다.
 
그러나 안심은 이르다. 2025년 11월 발표된 후속 조사에 따르면 2024년 고립사 사망자는 3,924명으로, 2023년보다 263명(7.2%) 늘었다. 인구 10만 명당 고립사 사망자 수도 2023년 7.2명에서 2024년 7.7명으로 다시 증가했다. 1년치 통계에서 나타난 소폭 하락은 문제의 해소가 아니라 통계적 요동이었던 셈이다. 매년 수천 명이 사회적 고립 상태에서 홀로 생을 마감하고 있고, 그 숫자는 각각 한 사람의 주거와 노동, 건강과 가족관계가 무너진 결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고립사가 특정한 한 세대에만 집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23년 고립사 사망자는 60대가 1,146명으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1,097명으로 뒤를 이었다. 40대도 502명이었다. 성별 미상자를 제외한 고립사 사망자 가운데 남성은 84.1%를 차지했고, 특히 50·60대 남성이 전체의 절반 이상(53.9%)을 차지하는 취약 집단으로 나타났다. 2024년 조사에서도 이 구도는 그대로 유지됐다.
 
이 통계는 고립사를 '홀로 사는 노인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은퇴 이후의 노인뿐 아니라, 일자리를 잃은 중년 남성, 이혼이나 가족 해체를 겪은 사람, 질병과 부채에 동시에 노출된 사람, 노동시장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이 위험에 놓인다. 고립사는 노년의 끝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중간에서 관계와 소득과 주거를 잃은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통로를 찾지 못할 때, 그 위험은 이미 시작된다.
 
고립사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고립사는 발견되는 날에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경찰이 문을 열고, 소방관이 현장에 들어가고, 공무원이 사망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사건은 시작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실제 고립사의 과정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실직은 소득만 줄이는 것이 아니다. 직장이라는 일상적 관계를 끊는다. 질병은 몸만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외출과 만남을 줄이고, 병원비와 약값으로 생활비를 압박한다. 부채는 통장 잔액만 줄이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친구에게 연락하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주거 불안은 집을 잃을 가능성만 뜻하지 않는다. 이웃과 지역사회에 정착할 기회를 빼앗는다.
 
이 신호들은 각각 다른 기관에 흩어져 있다. 실직은 고용센터에, 체납은 지방자치단체와 전력·수도 관련 기관에, 질병은 의료기관에, 임대료 연체는 집주인과 주거지원 체계에 남는다. 어느 한 기관의 화면만 보면 모두 '일상적인 행정 사건'이다. 그러나 여러 신호가 한 사람에게 겹치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 고립의 경고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의 행정이 사건을 연결해 읽기보다 기관별로 나누어 처리한다는 데 있다. 복지 담당자는 복지 신청이 들어와야 움직이고, 고용기관은 구직 등록이 있어야 개입하며, 의료기관은 진료가 끝나면 환자의 생활 전체를 책임지지 않는다. 전기와 수도가 끊겨도 그것은 우선 요금 체납 사건이지 고립사 위험 신호로 해석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은 연결돼 무너지는데, 행정은 분절된 채 대응한다.
 

 
발견의 최전선은 옮겨갔는데,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고독사예방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고립사 위험자를 적극 보호하고, 현황 파악과 예방, 대응의 각 단계에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도록 규정한다. 또한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생애주기별 대책과 위험자의 조기 발견 및 지원체계를 포함하도록 하고 있다.
 
법의 방향은 분명하다. 고립사가 발생한 뒤 시신을 처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위험에 이르기 전 사람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기 발견'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실행되지 않는다. 누가 발견할 것인지, 어떤 신호를 위험으로 볼 것인지, 발견한 뒤 어느 기관이 책임지고 개입할 것인지가 정해져야 한다.
 
2024년 조사는 이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내놓는다. 고립사 사망자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임대인·경비원 등이 43.1%로 가장 많았고, 가족이 26.6%, 이웃 주민이 12.0%, 보건복지서비스 종사자가 7.7%로 뒤를 이었다. 최근 5년간의 추이를 보면 가족이나 지인에 의한 발견 비중은 꾸준히 줄고, 임대인이나 보건복지 종사자에 의한 발견은 늘고 있다. 마지막 안부를 확인하는 사람이 가족에서, 계약 관계로 얽힌 낯선 타인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통계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준다. 하나는 현장에서 실제로 발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통장, 집배원, 방문간호사, 임대인, 경비원처럼 국가가 아닌 민간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그 역할이 이미 상당 부분 '가족'에서 '이해관계로 얽힌 타인'에게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임대인과 경비원이 최초 발견자의 40%를 넘는다는 것은, 이들이 사실상 고립사 예방망의 첫 번째 접점이 됐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들이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불안정한 안전망이라는 데 있다. 개인의 선의와 책임감에 의존하는 체계는 담당자가 바뀌거나 업무가 과중해지는 순간 작동을 멈춘다. 임대인은 월세가 밀렸다는 사실은 확인하지만, 세입자의 안부를 확인할 의무는 지지 않는다. 경비원은 순찰을 돌지만 복지 사례관리자가 아니다.
 
고립사 예방을 '이웃의 관심'이나 '임대인의 선의'로만 설명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민간의 도덕성으로 바꾸는 일이다. 통계가 보여주듯 발견의 최전선은 이미 민간으로 넘어갔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언제, 어떻게 확인하고 어디로 연락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다. 국가는 누군가의 호의가 끊겨도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위험자를 찾는 기술이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최근 고립사 예방 정책은 인공지능, 스마트 기기, 전력·통신 사용량 분석 등 기술 기반의 안부 확인으로 확장되고 있다. 일정 시간 움직임이 없거나 전기 사용량이 급감하면 담당자에게 알림을 보내는 방식이다. 사람이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술은 분명 유용한 보조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은 연결의 대체물이 아니다.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위험 신호일 수 있지만, 왜 움직이지 않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가 잠들었기 때문인지, 우울과 질병 때문인지, 단순히 기기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인지 판단할 수 없다. 경보가 울린 뒤 누가 방문하고, 무엇을 묻고, 어떤 지원으로 연결할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더구나 모든 고립된 사람이 감시 기술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 복지기관에 대한 불신, 과거의 강압적 행정 경험 때문에 기기 설치를 거부할 수 있다.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험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고립사 예방의 목표는 사람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아플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지, 끼니와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지,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생존 확인은 최소한의 안전망이지, 삶의 회복이 아니다.
 

 
발견된 뒤에도 사람은 다시 사라진다
 
고립사 문제는 시신이 발견되는 순간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부터 다른 행정 공백이 드러난다. 연고자를 찾고, 시신을 인수할 사람을 확인하고, 장례와 화장을 진행해야 한다. 남겨진 주거와 유품, 임대차 관계, 체납금, 개인정보와 디지털 계정도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고립사한 사람의 방은 쉽게 '청소해야 할 공간'으로 환원된다. 그 안에 있던 사람의 병력과 관계, 빚과 노동의 흔적은 빠르게 치워진다. 사망자의 물건을 누가 보관하고, 어떤 것을 폐기하며, 남은 보증금과 채무는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안내는 유족이 없는 경우 더욱 불분명하다.
 
사망 이후의 행정은 대체로 법적 권리와 의무를 확인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고립사한 사람의 삶은 법적 관계만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연락은 끊겼지만 실제로 고인을 알고 있던 이웃이 있을 수 있고, 가족은 없지만 오래 교류한 동료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장례에 참여하거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면, 고인은 두 번 사라진다. 한 번은 발견되지 않은 채, 또 한 번은 아무도 애도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고립사 대응은 사망 전의 예방정책과 사망 후의 장례·유품·주거정책을 연결해야 한다. 살아 있을 때는 복지의 대상이었지만 죽은 뒤에는 장사 행정의 대상이 되는 식으로 부처와 책임이 끊겨서는 안 된다.
 
고립사를 막는다는 말은 무엇을 막는다는 뜻인가
 
고립사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구호는 아름답지만, 정책 목표로는 모호하다. 모든 사람이 죽는 순간 누군가와 함께 있게 만들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혼자 사는 사람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고립으로 미끄러지는 과정을 더 일찍 발견하고 되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위험을 노인의 범주에 가두지 않는 생애주기별 접근이 필요하다. 보건복지부의 통계에서 확인되듯 50·60대 남성은 핵심 위험집단이지만, 청년과 중년, 장애인, 이주민, 주거 취약계층, 가족관계가 단절된 사람도 각기 다른 경로로 고립될 수 있다. 같은 '고립사 위험자'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사람을 한 프로그램으로 관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위기 신호를 기관 사이에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를 지키면서도 반복적인 체납, 장기 미취업, 응급실 이용, 복지 신청 중단, 우편물 방치 등 생활 신호를 통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법적·기술적 장치가 필요하다. 다만 데이터가 위험자를 자동 분류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분류된 사람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실제 서비스와 관계로 연결하는 전담 인력이 필요하다.
 
셋째, 임대인·경비원처럼 이미 최전선에서 발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민간 주체를 예방 체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들에게 위험 신호를 알아보는 최소한의 교육과, 발견했을 때 연락할 명확한 창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조기 개입의 가능성은 크게 달라진다. 발견의 책임을 개인의 선의에만 맡겨두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발견자가 가족에서 타인으로 옮겨가는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넷째, '한 번 방문하고 종결하는 복지'를 바꿔야 한다. 고립된 사람일수록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문을 열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고, 지원 제안을 거절할 수 있다. 그 거절을 곧바로 복지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정 기간 뒤 다시 찾아가고, 같은 담당자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지역 인력이 관계를 이어가는 체계가 필요하다.
 
다섯째, 고립사 예방을 주거와 노동과 건강의 정책으로 넓혀야 한다. 안부 전화만으로는 실직과 질병과 주거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고립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조건의 문제이기도 하다. 안정적인 주거, 적절한 소득, 치료받을 권리, 다시 일할 기회,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지역공간이 함께 제공돼야 한다.
 

 
혼자 죽지 않게 하는 것보다, 혼자 살아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고립사를 예방한다는 말은 자칫 죽음을 막는 정책처럼 들린다. 그러나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죽음을 막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사회적 고립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을 모두 위험한 사람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존중하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이 아니어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수급자가 아니어도 위기에서 지원받을 수 있으며, 한 번 거절했다고 해서 지원체계에서 영원히 탈락하지 않아야 한다.
 
고립사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는 아파트도, 원룸·오피스텔도 아닌 일반 주택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고립사가 외딴 산골이나 특별한 공간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평범한 주거지, 매일 지나치는 복도와 현관 안에서 발생한다.
 
문제는 사람이 없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서로의 삶을 확인하지 않는 곳이다.
 
한 집의 문이 닫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문이 닫힌 뒤 어떤 신호가 반복되고, 그 신호를 누가 확인하며, 위험이 감지됐을 때 어떤 지원이 이어질지는 국가가 설계할 수 있다.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방치해서도 안 되고, 안전을 명분으로 감시해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통제와 방치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신뢰 기반의 공공 안전망이다.
 
발견되지 않는 죽음이 우리에게 묻는 것
 
한 사람이 죽고도 며칠, 몇 주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관계를 잃었다는 뜻이고, 여러 기관에 흩어진 위험 신호가 하나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정리할 공적 절차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립사는 개인의 불운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회적 조건을 품고 있다. 가족관계의 변화, 노동시장의 불안정, 주거비 부담, 질병과 정신건강, 지역공동체의 약화, 복지 행정의 분절이 한 사람의 삶에서 겹칠 때 고립은 깊어진다. 그리고 그 겹침의 결과는 한 해의 통계가 아니라, 3년 연속 증가하는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는 이제 '누가 혼자 사는가'를 묻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누가 사회적으로 사라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려면, 발견되지 않은 시신을 찾는 행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 살아 있지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하는 사람,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신청하지 못하는 사람, 문을 열 힘과 이유를 잃어가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죽음은 누구나 혼자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죽음까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혼자 죽지 않는 사회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혼자 살아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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