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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회귀

풍수 지관이 기후위기를 막는다

기존 공동묘지를 에너지 자립형 '생태추모공원'으로.


장묘업하는 지관에게 물어봤다. 묘지 위에 태양광 패널을 올리면 어떻겠냐고.


돌아온 답은 예상대로였다.


지기(地氣)가 차단된다. 빛의 반사가 살기(殺氣)를 부른다. 전자파가 동기감응(同氣感應)을 교란한다.


듣고 있자니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이 촘촘한 반대 논리의 체계가. 어떤 새로운 것이 들어와도 막아낼 수 있도록, 수백 년을 다듬어 온 거부의 언어들이.

 


동기감응으로 탄소중립 하실 겁니까


태양광 패널을 반대하는 풍수 논리를 하나씩 뜯어보자.


첫째, 지기가 차단된다고 했다. 햇빛과 비와 바람이 자연스럽게 순환해야 땅에 생기가 돌아온다는 논리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그 "생기"가 과학적으로 측정된 적이 있는가. 유골 위에 패널 그늘이 지면 자손의 어떤 기운이 어떻게 달라진다는 것인가. 그 인과 관계를 단 한 번이라도 검증한 자료가 있는가.


없다. 단 한 건도.


둘째, 패널의 반사광이 살기라고 했다. 강화유리가 빛을 반사하면 청룡·백호의 기운이 교란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자. 묘지 주변의 도로는 어떤가. 차창이 반사하는 빛은 살기가 아닌가. 인근 건물의 유리창은. 빗물에 젖은 석물(石物) 표면은. 지관들이 그토록 열심히 설치해 온 그 번들번들한 오석과 화강암 상석은.


그들은 이 물음에 답한 적이 없다.


셋째, 전자파가 동기감응을 교란한다고 했다. 패널과 인버터의 전자파가 유골에 영향을 준다는 논리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전자파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기지국이 산 중턱에 서 있고, 산악 도로를 따라 송전선이 지나간다. 지관들이 명당이라고 짚어준 자리 바로 옆에 고압선이 지나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때는 왜 동기감응을 말하지 않았는가.


태양광 패널이 들어오려 할 때만 이 논리들이 깨어난다.

 


풍수 지관과 장묘업자, 그들이 지켜온 것은 산이 아니라 시장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


지관이 태양광을 반대하는 이유는 지기 때문이 아니다. 장묘업자가 반대하는 이유는 환경 때문이 아니다.


패널이 들어서면 묘지를 이곳저곳 옮길 이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햇빛이 제대로 들어야 지기가 산다"는 논리로 방향을 바꾸고, "물길이 바뀌었다"는 논리로 이장을 권유하고, "나무뿌리가 침범했다"는 논리로 파묘를 유도해 온 그 수입 구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장이 줄면 석물 공사가 줄고, 파묘가 줄면 장묘업자의 반복 계약이 끊긴다.


태양광 설비가 묘역 위에 자리 잡으면 묘는 고정된다. 패널 아래에 있는 자리를 두고 "기운이 더 좋은 곳이 있다"며 이장을 부추기기 어려워진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불안의 재생산 구조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 구조는 오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묘지 집단화를 막아선 것도 풍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산은 잘게 찢어진 가족묘와 문중묘로 뒤덮였다. 집단화된 공동묘지가 거대한 도시 숲과 생태 공간으로 변모한 서구의 사례와 정반대의 결과였다. 숲이 묘지가 된 것이다.


이번에도 같은 패턴이다. 묘지 위 태양광은 죽은 땅을 살리는 시도다. 더 이상 이장이 필요 없고, 더 이상 파묘할 이유가 없으며, 그 자리에서 탄소를 줄이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막고 있는 논리가 바로 지기와 살기와 동기감응이고, 그 논리 뒤에 서 있는 이해관계자가 지관과 장묘업자다.



"자연의 이치"를 말하면서 자연을 믿지 않는다


풍수가 자연을 말한다는 것은 오래된 거짓말이다.


정말 자연을 믿는다면 왜 나무뿌리가 유골을 감싸는 것을 "목염(木廉)"이라며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순환이다. 유기물이 흙으로 돌아가는 경이로운 과정이다. 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회벽을 바르는가. 땅의 호흡을 막는 것이야말로 진짜 지기 차단 아닌가.


풍수는 자연과의 조화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몸을 자연으로부터 끝없이 격리하려 해왔다. 시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질서를 "침범"이라 규정해 온 사상이다. 그러면서 태양광 패널이 지기를 차단한다고 말한다.


자연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무덤 위 패널이 들어설 자리에서 태양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죽은 이의 자리가 산 자들의 에너지를 밝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동기감응의 가장 근사한 형태 아닌가.

 


2031년이 오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공설묘지는 안치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2031년이면 대규모 유골 처리 문제가 현실이 된다. 묘지 부지는 부족하고, 화장장은 포화 상태이며, 자연장 제도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


이 위기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묘지를 자원으로 재해석하는 상상력이다. 더 이상 이장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묘지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탄소를 상쇄하며 후세대에게 부담을 넘기지 않는 구조.


묘지 위 태양광은 그 상상력의 출발점 중 하나다.


그런데 지관이 말한다. 살기가 인다고. 지기가 막힌다고. 장묘업자가 말한다. 묘지의 품격이 떨어진다고. 유족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검증된 적 없는 개념으로, 계산된 이해관계로, 기후 위기 앞에 무릎 꿇은 시대의 가장 실용적인 시도 하나를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경고한다

검증되지 않은 언어로 사람의 죽음을 팔고, 자연의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해 온 시간은 끝나가고 있다. 기후위기는 명당을 가리지 않는다. 폭우는 좌청룡을 비껴가지 않고, 폭염은 우백호 뒤에 숨지 않는다. 지기(地氣)가 아니라 탄소 농도가 이 땅의 미래를 결정한다.


불안은 상품이 되었고, 죽음은 시장이 되었으며, 조상은 끝없는 소비의 명분으로 동원되고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풍수 논리로 사람의 불안을 자극하며 이장과 파묘와 석물 공사를 반복 판매해 온 지관과 장묘업자의 행태는 이제 사회적으로도 분명한 비판과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조상의 이름을 팔아 산 자의 불안을 먹고 자란 그 오랜 장사를, 이제는 사회가 똑바로 들여다볼 것이다.


죽음은 공포 마케팅의 재료가 아니다. 조상은 투기의 도구가 아니다. 산과 숲은 인간 욕망의 제단이 아니다.


그리고 묘지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