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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엔딩

장개협의 유산

 
한국 장례 문화의 전환점을 이야기할 때 '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이하 장개협)를 빼놓기 어렵다. 2024년 12월 기준 한국의 화장률은 95%를 넘어섰다. 불과 30년 전, 1990년대 중반까지 화장률은 20% 수준이었다. 이 극적인 전환의 중심에 장개협이 있었다.
 
그런데 숫자 뒤에 남겨진 질문은 묵직하다. 한국 장례는 나아졌는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망가진 것인가.
 

문제는 실재했다, 그러나 본질은 달랐다

장개협을 평가하려면 그들이 등장한 배경부터 직시해야 한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이후 형성된 매장 중심 관행은 현대에까지 이어졌고, 구릉지와 야산이 묘지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해마다 여의도 면적의 3배에 해당하는 9㎢ 땅이 묘지로 전환되고 있었다. 수도권 공설묘지는 포화 상태였고, 평택의 경우 1970~90년대에 조성된 공설묘지들이 불과 18~31년 만에 만장되었다. 핵가족화로 2~3대만 지나도 조상 묘를 관리하지 못하게 되면서, 전체 묘지의 40% 이상이 연고자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이것은 장개협이 만들어낸 공포가 아니었다. 통계로 확인된 현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대목이 있다. 장개협은 스스로 인정했다. 문제의 본질은 매장이라는 장법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고 산재된 묘지의 형태에 있다고.
 
일본이나 유럽에 묘지 문제가 없는 이유는 화장률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묘역을 집약하고 소형화하며 재사용하는 제도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묘지 1기는 2.5~4㎡에 불과하고, 시한부 매장 후 재사용이 기본이다. 법정 허용 기준만 최대 80㎡에 달하는 한국과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장개협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시했다.
 
묘지 집약화, 공원화, 공동 운영이라는 구조적 해법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훨씬 단순하고 동원하기 쉬운 구호였다.
 
"묘지는 악이다. 화장은 선이다."
 
이 이분법이 이후 20년간 대한민국 장례 행정을 지배했다.
 

공포 마케팅이 만든 것은 봉안당 자본주의였다

장개협의 핵심 전략은 "전 국토의 묘지화"라는 공포였다. 언론과 정부 부처는 이를 충실히 전달했고, 2001년 장사법 전면 개정으로 제도화되었다. 신규 묘지의 설치 기간을 15년으로 제한하고, 이후 유골을 꺼내 화장하도록 강제했다. 형사처벌을 동원한 이 방식은 문화 개혁이라기보다 행정 강제에 가까웠다.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화장률은 2001년 38.3%에서 2009년 65%, 2016년 82.7%, 2024년 95%를 넘어섰다. 수치로만 보면 성공이다.
 
그런데 국토 잠식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장사법 시한부 매장제는 기존 묘지에 소급 적용이 없었다. 화장률이 아무리 올라가도, 이미 전국 야산을 가득 채운 수백만 기의 묘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다. 화장률 95%가 된 지금도 기존 묘는 한 평도 줄지 않았다. 장개협은 이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국토 잠식 문제는 처음부터 화장률과 연동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화장 이후의 공백을 채운 것은 무엇이었나.
 
사설 봉안당이었다. 매장 묘지는 '산 자의 땅을 침범한다'며 규제했지만, 산지를 깎아 콘크리트로 세운 초대형 봉안 건축물은 장려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묘지는 개인이 소유하지만, 봉안당은 기업이 소유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사설 봉안당의 안치 비용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벌어졌다. 불법 운영과 산지 훼손이 속출했다. 유족의 죄책감을 이용한 고가 유골함·위패 판매가 구조화된 산업이 되었다. 장개협이 그토록 비난한 묘지 자본주의는 단지 봉안당 자본주의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화장장을 공장으로 만들었다

화장 수요가 폭증했지만 화장장 인프라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장개협은 이 문제를 의제로 삼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한국 화장장 대부분은 일본에서 도입된 대차식(臺車式) 화장로를 표준으로 삼고 있다. 대차식은 시신을 얹은 대차를 화로에 밀어넣는 방식으로, 의례적 시각화를 중시한 일본 특유의 설계다. 반면 유럽과 미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캐비닛식은 열효율이 높고 처리 시간이 짧으며 유지비가 낮다. 장비 효율화로 일부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그러나 대차식 고수는 시설 공급자와 운영자의 기득권과 맞닿아 있었고, 장개협은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지금 한국의 화장장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공간이 아니라 회차 운영으로 돌아가는 처리 시설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유족이 서두르고, 다음 회차를 기다리는 가족이 줄을 선다. 슬픔조차 시간 제한을 받는다.
 
이것이 장개협이 말한 "선진 장묘 문화"의 실체다.
 

수목장을 방해했다

2000년대 초 수목장이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했을 때, 장개협의 반응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수목장을 제도화하는 대신 '자연장'이라는 더 넓은 상위 개념으로 희석시켰다. 자연장 제도화는 2008년에야 이루어졌고, 그 틀 안에서 정작 생태적 가치를 가진 수목장은 극히 제한된 채로 방치되었다. 이름만 자연장인 석물 납골묘가 양산되었다.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수목장의 본질은 지워지고, 기존 봉안 산업과 충돌하지 않는 형태로만 허용되었다.
 
수목장에 대한 국민 선호도는 일찌감치 봉안시설을 앞질렀다. 그러나 실제 이용률은 지금도 현저히 낮다. 선호와 이용 사이의 이 간극은 정책 실패의 직접적인 증거다.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간극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장개협이 그 조직력과 사회적 동원력을 화장 강요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썼더라면 어땠을까.
 
기존 묘지의 집단화를 강제했더라면. 흩어진 산재 묘를 마을 단위, 문중 단위로 집약하고 공원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지금 전국 야산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수백만 기의 방기 묘지 문제는 실질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장법을 바꾸는 것으로는 이미 조성된 묘지를 한 평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무연 묘지의 수목장화 운동을 병행했더라면. 연고가 끊긴 방기 묘지는 전체 묘지의 40% 이상이었다. 그 묘지들을 국가와 지자체가 거두어 수목장림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일찍부터 제도화했다면, 오늘날 수목장은 변방의 장법이 아니라 한국 장례의 당당한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 회귀 묘지 운동을 했더라면. 거대한 봉안당 건축 대신, 화장 유골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문화를 초기부터 설계했더라면. 봉안 산업이 장례 시장을 독점하기 전에, 죽음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감각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어렵거나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실천되고 있던 방식들이었다. 장개협에게는 그것을 밀어붙일 사회적 권위도, 정치적 동력도 충분히 있었다.
 
그들은 그 힘을, 화장로 앞으로 줄 세우는 데 썼다.
 

개혁이 아니라 전환이었다

장개협이 남긴 것은 개혁된 장례 문화가 아니다. 매장 중심의 문제를 봉안 중심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해결하지 않고 옮겼다.
 
그들이 바꾼 것은 한국인이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끝내 설계하지 못한 것은, 한국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었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화장률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 수치 뒤에 남은 것은 가장 인간답게 죽기 어려운 구조다. 그것이 장개협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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