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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여행

똥자루

죽음명상(Death Meditation , 스리랑카)

 


부처에게는 부정관(不淨觀)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사람의 몸뚱이는 대소변과 피, 콧물이 가득한 더럽고 냄새나는 똥자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한 수행법이다.


자신의 몸이 똥자루임을 알고 있다면, 그 똥자루의 처리를 아무 말 없이 타인에게 넘기는 것이 과연 집착 없는 행위인가. 아니면 그냥 무책임한 것인가.


법륜은 말한다. 의식이 없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산 사람들에게 맡기면 된다. 결정은 산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죽고 나면 실제로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내 똥자루가 어떻게 처리되기를 원하는지, 어디에 묻히기를 바라는지, 어떤 방식으로 보내지기를 원하는지. 지금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말하지 않고 떠난다면 그 무게는 고스란히 남은 사람에게 넘어간다.


남은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슬픔이 가장 극심한 그 순간, 해야 하는 결정의 목록은 길다. 화장인지 매장인지, 어떤 관을 쓸 것인지, 봉안당에 모실 것인지 산골을 할 것인지. 고인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면 남은 사람은 근거가 없다. 결국 장례 업체가 권하는 표준 패키지를 선택하게 된다. 고인의 뜻이 아니라 상황의 압력에 의한 선택이다. 남겨진 사람은 그 선택이 맞았는지 평생 모른다.


더 깊은 문제는 애도다. 남은 사람이 제대로 슬퍼하려면 처리할 것들이 먼저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런 준비가 없는 죽음 앞에서 유족은 슬픔보다 처리가 먼저가 된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슬픔이 밀려온다는 사람들이 많다. 장례 기간 동안 너무 바빴다고. 그 바쁨의 상당 부분은 고인이 미리 정해두었다면 없었을 일들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부처가 제자들에게 유해 공양에 관여하지 말라고 한 것은 수행자에게 한 말이었다. 집착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라는 맥락이었다. 동시에 부처는 덧붙였다. 재가신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재가신자들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다. 죽음을 둘러싼 준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법정은 이렇게 말했다. 나무꾼도 안 다니는 길로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데까지 들어가서 쓰러지는 거야. 기운이 남아 있으면 나무 긁어서 깔고 덮고 눕는 거지. 완전 기진맥진 상태에서 그냥 그대로 가는 거야. 시체도 못 찾는 거지. 그것이 가장 멋진 죽음이지. 흔적 없는 죽음. 제주로 가는 밤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그대로 낙하하면 그게 곧 천화(遷化)야.


수행자가 꿈꾸는 죽음의 이상으로는 충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흔적 없는 똥자루 뒤에도 남은 사람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은 사람들은 이별을 해야 했다. 내 똥자루를 어떻게 할지 말해두는 것과 흔적 없이 떠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자신의 똥자루임을 알고 있다면, 그 처리를 말해두는 것이 살아있는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배려다.


죽고 나면 모른다. 맞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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