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명(考終命) — 우리는 언제부터 집에서 죽지 않게 되었을까
엔딩연구소

오복(五福)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 살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덕을 쌓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고종명(考終命)'이다. 제명에 죽는 것, 즉 수명을 다하고 집 안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 것. 옛 사람들은 이것을 복 중의 복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의 80%는 병원에서 죽는다.
통계만 놓고 보면, 오복 중 하나를 누리는 사람이 다섯 중 하나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게 단순히 죽는 장소의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 뭔가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린 걸까?
고종명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수명을 다할 것, 집 안(正寢, 정침)에서 맞을 것, 가족이 곁에 있을 것. 이 세 가지가 갖춰진 죽음이 '좋은 죽음'이었다. 반대로 갑작스러운 사고사, 타지에서의 객사, 자살은 '나쁜 죽음'이었고, 그렇게 죽은 영혼은 제대로 된 죽음으로 간주받지 못했다.
이건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집에서 죽는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공간에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우리 공동체의 방식으로 마무리된다는 뜻이었다. 죽음의 주권이 개인과 가족에게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 정침이 사라졌다.
아파트에는 관과 상여가 나올 공간이 없다. 엘리베이터는 좁고, 조문객을 맞을 공간도 없다. 노인은 요양원에 있고, 자녀들은 다른 도시에 산다. 설령 집에서 임종을 맞더라도, 119를 부르는 순간 시신은 병원으로 간다. 죽음이 집 안에 머물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20세기를 거치면서 하나씩 해체되었다.
그 공백을 채운 것이 병원장례식장이다.
병원장례식장의 논리는 표면적으로 합리적이다. 어차피 병원에서 돌아가셨으니, 장례도 거기서 치르는 게 편하지 않냐는 것이다. 이동도 없고, 절차도 간편하고, 모든 것이 한 건물 안에서 해결된다.
그런데 바로 그 '편리함' 안에 문제가 있다.
전통적 믿음에서 객사(客死)는 가장 나쁜 죽음 중 하나였다. 낯선 곳에서 죽으면 혼이 돌아올 방향을 잃는다고 보았다. 혼은 자신이 살던 집을 알아야 돌아올 수 있는데, 타지에서 죽은 혼은 그 방향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지에서 죽으면 시신을 반드시 집으로 데려왔고, 혼을 부르는 초혼 의례를 특별히 더 정성스럽게 치렀다.
병원에서의 죽음은 구조적으로 객사의 조건과 닮아 있다. 임종하는 공간은 가족의 공간이 아니라 의료 시스템의 공간이다. 임종 순간 가장 가까이 있는 이는 의료진이다. 시신을 처음 처리하는 손은 영안실 직원의 손이다. 그리고 병원장례식장은 이 객사를 완성한다. 죽은 장소, 빈소를 차리는 장소, 발인 준비를 하는 장소가 모두 같은 건물이다. 혼이 귀환할 집은 동선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한국은 객사를 통계적 정상으로 만든 사회다. 그리고 병원장례식장은 그 정상화를 공간적으로 완성한 장치다.
더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자.
전통 장례에서 죽음의 처리는 공동체의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수의를 만들고, 상여를 메고, 음식을 나눴다. 이 구조에서 누군가가 죽음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은 구조적으로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죽음은 상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의 의무였다.
병원장례식장은 이것을 뒤집는다. 치료를 맡은 기관이 사후 처리까지 맡는다. 환자가 살아도 병원은 돈을 받고, 죽어도 병원은 돈을 받는다. 치료에 실패한 바로 그 기관이, 그 실패의 결과를 수습하는 사업도 함께 운영한다.
의도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구조 자체가 갖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망자를 제대로 보낼 의무를 가진 사람(가족과 공동체)과 그 과정에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장례 제공자)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오래된 원칙이, 병원장례식장이라는 구조 안에서는 성립하기 어렵다.
연명치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고종명에서 '수명을 다한다'는 것은 오래 사는 것과 다른 개념이다. 때에 맞게 마무리되는 것, 억지로 붙잡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의료는 이 '때'를 인위적으로 조정한다. 언제까지 연명할지, 어느 시점에 치료를 중단할지... 이 결정이 가족의 손을 떠나 의료 시스템과 법적 절차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병원장례식장은 이 교란의 공간적 완성판이다. 언제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 죽은 후 몸이 어디 놓일지... 이 모든 결정에서 개인과 가족은 점점 더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그 밀려남은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라 시스템의 자연스러운 작동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고종명이 오복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꽤 냉철한 인식이 담겨 있다. 좋은 죽음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관계가 뒷받침해주는 것이고, 공동체가 함께 준비하는 것이다. 복 중의 복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만큼 갖추기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조건을 갖추기가 더 어려운 사회를 살고 있다. 집은 좁아졌고, 가족은 흩어졌고, 죽음은 병원으로 이전되었다. 병원장례식장은 이 모든 변화의 최종 도착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착지라고 해서 종착지일 필요는 없다.
좋은 죽음을 다시 설계하는 일은, 병원장례식장이라는 구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편리함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는 일 말이다.
'엔딩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집에서 죽으면 변사자가 된다 (0) | 2026.04.06 |
|---|---|
| 반려견 전용 엔딩노트 (0) | 2026.04.06 |
| 엔딩노트 2026 (0) | 2026.04.06 |
| 4월 4일 엔딩데이 (1) | 2026.04.04 |
| 보건의료대리인 완전 가이드 (1) | 2026.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