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장제비 다음에 필요한 것, 공공안치시설
누군가 세상을 떠난 직후의 몇 시간을 떠올려 보자. 병원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가족은 아직 그 죽음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은 슬퍼할 틈을 주지 않는다. 고인을 어디에 모실지, 얼마를 내야 할지,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를 묻는 질문이 쏟아진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장례를 가족의 사적 부담으로만 남겨 두지 않기 위해 기본장제비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용을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인이 장례와 화장 절차에 들어가기 전까지 머물 안전한 공간이 없다면, 지원금은 곧장 민간시설 이용료로 빠져나간다. 장례의 첫 단계부터 가족의 경제력과 사는 곳에 따라 선택지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장제비와 함께 논의해야 할 제도가 있다. 바로 공공안치시설이다.
안치와 장례를 나누는 일
한국의 도시에서는 병원에서 숨을 거두면 대개 그 병원 지하의 장례식장 안치실로 고인을 모신다. 달리 갈 곳이 없거 나, 있어도 닿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족은 다른 곳을 알아보고 비용을 견줄 여유도 없이 고인을 안치하고, 그대로 장례를 시작한다. 안치와 장례가 한 시설에 묶여 있으니, 고인을 어디에서 보낼지는 사실상 병원 장례식장이 정하게 된다.
그러나 고인을 모시는 일과 장례를 치르는 일이 반드시 같은 곳에서 이루어질 이유는 없다. 고인을 먼저 공공안치시설로 모시고, 유족은 그동안 차분히 장례의 방식과 장소를 정하면 된다. 안치는 공공이 맡고, 장례는 유족이 고른다. 이것이 사망 직후 유족 앞에 놓인 선택의 격차를 줄이는 출발점이다.
공공안치시설은 추모의 공간이 아니다. 빈소도, 조문객을 맞는 곳도 아니다. 일정한 온도와 위생, 안전한 출입 관리, 막힘없는 운구 동선, 유족과 종사자의 개인정보를 지키는 운영 기준을 갖춘 기능 시설이다. 마음을 달래는 장식보다 냉장과 위생, 보안과 운영이라는 기본이 먼저다. 고인을 존엄하게 모신다는 말은 결국 제대로 설계되고 꾸준히 관리되는 공간에서 비롯된다.
가족이 없을 때만 나서는 사회를 넘어
지금의 장례복지는 가족의 유무에 따라 작동 방식이 갈린다. 연고자가 없거나 유족이 시신 인수를 거부할 때에야 공영장례와 행정 절차가 개입한다. 그러나 가족이 있다는 사실과 가족이 장례의 모든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다르다. 가족이 있어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수 있고, 멀리 살 수 있으며, 절차를 모를 수 있고, 당장 비용을 마련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공공안치시설은 '가족이 없을 때 내어 주는 마지막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필요한 순간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보편적 기반시설이어야 한다. 모두에게 열려 있을 때 낙인이 옅어지고,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저소득층과 무연고 사망자에게는 이용료 감면이나 전액 지원을 더하면 된다.
기본장제비와 공공안치시설은 서로 다른 정책처럼 보이나 실은 한 쌍이다. 시설이 부족한데 현금만 지급하면 지원금은 이용료와 운구비로 사라지고, 시설만 지어 놓고 입관과 화장 비용을 그대로 두면 가족은 여전히 장례비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비용과 공간은 떼어 놓을 수 없다.
해외에서 확인되는 방향
장례를 가족의 자력에만 맡기지 않는 흐름은 해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영국의 Funeral Expenses Payment, 뉴질랜드의 Funeral Grant, 일본 도쿄도의 장제부조, 독일의 사회법전 제12권 제74조는 형편이 어려운 이의 장례비를 보조한다. 일본 야토미시는 생활보호 대상자 등의 화장장 사용료를 면제하거나 줄여 주고, 호주 퀸즐랜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금 대신 정부와 계약한 장의사가 간소한 화장이나 매장을 직접 마련한다.
소득과 자산을 따지지 않고 일반 주민에게까지 지원을 넓힌 나라도 있다. 스웨덴은 모든 거주자가 소득의 0.292%(2026년)를 장례 부담금으로 내고, 그 대가로 화장과 25년간의 묘지 사용을 보장받는다. 노르웨이는 지자체가 일반 예산으로 묘지 운영비를 대 주민에게 매장묘를 무료로 쓰게 하고, 아직 유료인 화장도 수수료를 없애자는 제안이 2026년 의회에서 논의되었다. 중국은 새 장례관리조례로 운구, 안치, 화장 같은 기본 서비스를 목록으로 정하고 요금을 법으로 묶었으며, 2,500곳이 넘는 지역이 일반 주민의 기본 서비스 비용까지 지원한다. 선전은 시에서 숨져 화장하면 호적과 상관없이 최대 2,200위안(약 47만원)을 시가 낸다.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스웨덴은 목적이 정해진 부담금으로, 노르웨이는 지자체 예산으로, 중국은 시 재정과 가격 규제로 장례의 기본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장례를 시장과 가족의 지불 능력에만 맡기지 않는다는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사는 곳에 따라 마지막 절차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화장장이 부족한 곳에서는 유족이 다른 지역까지 고인을 모시고 가야 하고, 안치시설이 모자란 곳에서는 비용과 대기 시간이 함께 늘어난다. 이 문제를 지방자치단체의 의지에만 맡겨 둘 수는 없다. 인구가 많은 곳에는 수요에 맞는 시설이, 인구가 적고 고령 인구가 많은 곳에는 이웃 지자체와 함께 쓰는 권역별 시설이 필요하다. 모든 지역에 같은 크기의 건물을 짓자는 것이 아니다. 주민이 무리 없는 거리와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망을 만들자는 것이다. 국가는 최소한의 기준을 정하고 재정을 뒷받침하며, 지방자치단체는 지역 수요에 맞춰 시설을 배치하고 공공병원, 보건소, 화장시설, 공영장례를 하나로 이어야 한다.
공공안치시설은 공중보건과 재난 대응의 기반이기도 하다. 감염병이나 대형 사고로 사망자가 갑자기 늘어날 때, 안치 공간의 부족은 유족의 부담을 넘어 위생과 안전의 공백으로 번진다. 상하수도와 소방시설처럼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해도 없으면 공동체가 돌아갈 수 없는 시설이 있다. 공공안치시설도 그렇다.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필요로 하는 시설이다.
존엄은 의례가 아니라 조건에서 시작된다
고인의 존엄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장례 의식과 추모의 언어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존엄은 격식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고인이 안전하고 깨끗한 곳에 계신지, 유족이 돈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되는지, 먼 지역까지 고인을 옮겨야 하는지에 따라 존엄의 현실은 달라진다. 공공안치시설은 죽음을 아름답게 꾸미는 공간이 아니라, 장례가 시작되기 전 가장 실무적이고 차가운 단계에서 사람의 존엄을 지키는 공간이다. 감정이 가장 무너진 순간의 가족에게 시설을 찾아 헤매는 수고까지 떠넘겨서는 안 된다.
물론 건립비와 운영비가 들고, 이용률이 낮은 지역에서는 비효율이 생길 수 있다. 충분히 따져 보아야 할 문제다. 그러나 학교와 소방서와 보건소를 날마다의 이용률만으로 평가하지 않듯, 공공안치시설의 가치도 평상시 이용률로 재서는 안 된다. 효율은 짓지 않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권역별 공동 이용, 공공과 민간의 협력, 표준화된 운영, 단계적 확충으로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 민간시설과 경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민간만으로는 지키기 어려운 최소한의 접근성과 안전을 공공이 맡자는 것이다.
장례를 사회적 권리로
이것은 죽음을 국가가 통제하자는 뜻도, 가족의 애도를 대신하자는 뜻도 아니다. 가족이 고인을 보내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안전, 위생, 공간, 이동의 조건을 공공이 받쳐 주자는 뜻이다. 이를 위해 공공안치시설을 사회기반시설로 규정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분명히 하고, 모든 시민에게 열린 시설로 운영하되 저소득층과 무연고 사망자를 추가로 지원하며, 지역별 사망자 수와 이동 거리에 맞춰 배치하고, 안치부터 화장까지 끊기지 않는 전달체계를 마련하고, 이용료와 운영 기준을 공개해 유족이 불확실한 비용 앞에 서지 않게 해야 한다.
기본장제비가 장례의 비용을 보장하는 제도라면, 공공안치시설은 장례의 출발점을 보장하는 제도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닿지 못한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남은 가족이 가장 먼저 할 일이 시설과 비용을 찾아 헤매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고인을 안전하게 모실 자리가 있고, 기본 절차를 감당할 비용이 보장되어야 가족은 비로소 슬픔을 받아들이고 작별할 시간을 얻는다.
죽음 앞에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위로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어디에 모셔야 할지 몰라 헤매지 않는 것,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더 나은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나는 자리까지 사회가 곁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이다. 고인을 안전하게 모실 자리를 마련하고, 남은 이들에게 작별할 시간을 돌려주는 것. 공공안치시설은 죽음 이후의 일을 대신하는 시설이 아니라,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한 가족만의 몫으로 남지 않도록 사회가 내미는 가장 조용한 손길이다. 복지국가의 완성은 바로 그 손길이 닿는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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