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에서 죽지 않을 권리
한국에서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병원에서 죽는다. 전체 사망자의 70% 이상이다. 나머지는 요양병원이거나 요양원이다. 집에서 죽는 사람은 극소수다. 이것이 선택의 결과인지 물어야 한다. 대부분은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구조가 없었다.
병원 사망률이 높은 것은 의료의 문제가 아니다. 돌봄 시스템의 문제다. 병원 밖에서 통증 없이 죽을 수 있는 구조가 없으니 병원으로 가는 것이다. 구조가 없는 곳에서 선택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병원은 죽기 좋은 곳이 아니다
병원은 치료하는 곳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곳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병원의 기본값은 개입이다. 모니터가 울리면 의료진이 달려온다. 심폐소생술이 시작된다. 가족은 복도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병원은 원래 그런 곳이다. 문제는 그 공간에서 임종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말기 환자에게 병원 임종이 의미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렇다. 손에 정맥주사가 꽂혀 있다. 몸에 모니터 센서가 붙어 있다.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곁에 둘 수 없다.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어렵다. 밤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 냄새가 낯설다. 소리가 낯설다. 이 공간에서 사람은 환자가 된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치료받는 환자가 된다. 죽음이 의료 행위의 실패로 처리된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을 물으면 대답이 흐릿해진다. 통증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익숙한 냄새와 빛 속에서,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치료를 받지 않으면서 죽는 것.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죽음이다. 병원은 이 중 어느 것도 보장하기 어렵다.
왜 집에서 죽지 못하는가
집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문화적 터부 때문만이 아니다. 구조 문제다.
집에서 사람이 죽으면 경찰이 온다. 변사 처리 절차가 시작된다. 담당 의사가 없으면 사망진단서가 나오지 않는다. 사망진단서가 없으면 장례를 시작할 수 없다. 밤중에 상태가 나빠지면 119를 부른다. 119 대원은 심폐소생술을 시작한다.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문서가 있어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결국 응급실로 간다.
통증 조절이 안 된다. 가정형 호스피스 간호사가 방문하지만, 마약성 진통제를 재가에서 관리하는 체계가 없다. 통증이 심해지면 견딜 수 없어서 병원으로 간다. 가족이 감당할 수 없다. 보호자가 하루 종일 곁에 있어야 하는데, 직장이 있고 생활이 있다. 돌봄 인력을 고용하면 비용이 감당되지 않는다. 시스템이 없으니 가족이 혼자 버텨야 하고, 버티다 무너지면 입원을 선택하는 것이다.
병원 사망은 의료적 현상이 아니다. 돌봄 공백을 병원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식이 가능하다는 증거들
일본은 재택의(在宅医) 제도를 운영한다. 주치의가 정기적으로 가정을 방문하고, 임종이 예상되면 야간에도 연락받고 출동한다. 환자가 집에서 임종하면 의사가 방문해 사망을 확인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한다. 변사 처리가 아니다. 가족이 119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 이 구조 안에서 일본은 재택 임종률을 꾸준히 높이고 있다. 지역별로 재택의 수와 가정 방문 간호 기관 수가 많을수록 자택 임종률이 높아진다는 것이 연구로도 확인되었다.
영국의 앨런 켈레허(Allan Kellehear)가 제안하고 전 세계로 확산된 자비로운 공동체(Compassionate Community) 모델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 모델의 전제는 하나다. 임종과 죽음은 의료 시스템만으로 다룰 수 없다. 전문 의료진이 담당하는 것은 전체 돌봄의 5%에 불과하다. 나머지 95%는 가족, 이웃, 지역사회가 담당해야 한다. 자비로운 공동체는 이 95%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의 문제다. 직장, 학교, 종교 공동체, 자원봉사 네트워크가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일상적으로 지원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2025년부터 이 운동을 국가 전략으로 채택해 200개 이상의 기관이 참여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데스카페(Death Café) 운동은 현재 81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카페나 지역 공간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다. 의료진이 없어도 된다. 전문 상담가가 없어도 된다. 죽음을 일상의 언어로 꺼내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일본에서는 죽음 회피 문화 속에서 데스카페가 자발적으로 생겨나 임상 현장의 죽음 대화 부재를 지역사회에서 보완하고 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빈집이 임종 공간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한국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발상이 있다. 빈집이다.
한국 농촌과 지방 소도시의 빈집은 이미 수십만 채다. 도시에서도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공가(空家)가 늘고 있다. 이 공간들이 방치되거나 철거되는 사이, 지역사회에는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비의료적 공간이 없다.
일본에서는 빈집을 지역사회 교류 공간으로 전환하는 실험이 진행되어 왔다. 타운 컬렉티브하우스 개념이 대표적이다. 주거 기능뿐 아니라 지역 주민이 모이는 공간, 돌봄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빈집을 재구성한다. 이 발상을 임종 돌봄으로 확장하면 어떻게 되는가.
마을 호스피스, 혹은 공동체형 임종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병원도 아니고 자택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의료 기기가 없다. 링거가 없다. 대신 침대가 있고, 창이 있고, 정원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교대로 들른다. 말기 환자가 그곳에서 지낸다. 담당 의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통증을 조절한다.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있다. 임종을 맞이한다.
이것이 상상이 아닌 이유가 있다. 영국의 일부 커뮤니티 호스피스는 이미 이런 방식으로 운영된다. 전문 병동이 아닌 가정과 유사한 환경의 소규모 시설이다. 네덜란드의 버스하우스(Buurtzorg) 모델은 지역사회 간호사 팀이 자율적으로 가정 돌봄을 제공하는 구조로, 병원 입원 없이 자택 임종률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미국에서는 데스 도울라(Death Doula)라는 비의료 임종 돌봄 전문가가 가정 임종 과정 전체를 지원한다.
한국에 이것을 대입하면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보인다. 재택의 제도가 없다. 임종 확인 의사 없이 집에서 죽으면 변사 처리된다. 지역사회 돌봄 인프라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이 현재 없다는 사실이 만들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씩 따져보면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재택 임종 확인 체계다. 담당 의사가 환자의 말기 상태를 미리 기록해두고, 임종 후 전화 한 통으로 방문해 사망을 확인하는 절차다. 변사 처리가 아니라 의료적 확인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이것만 해결돼도 집에서 죽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119 프로토콜이 바뀌어야 한다. 연명의료계획서 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현장에 있을 때, 전국 어디서나 동일하게 소생술을 시작하지 않는 표준 절차가 적용되어야 한다. 지금은 지역마다 다르고 대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마약성 진통제의 재가 관리가 가능해야 한다. 통증이 조절되지 않으면 아무리 집에 있고 싶어도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의사의 처방 아래 간호사나 가족이 가정에서 진통제를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지역사회 돌봄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보호자 혼자 24시간 감당하는 구조는 지속 불가능하다. 이웃과 자원봉사자와 전문 돌봄 인력이 교대로 함께하는 구조, 그것이 자비로운 공동체의 실체다.
빈집을 공동체형 임종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은 제도와 예산이 필요하지만, 기존의 자원을 다른 목적으로 쓰는 발상의 전환이다. 지방소멸 대응 사업, 빈집 정비 사업, 사회주택 정책과 연결하면 재원의 경로가 생긴다.
돌봄의 문제다
한국 의료의 수준은 높다. 고가 장비 보급률은 세계 상위권이다. 그런데 말기 환자에 대한 돌봄 수준은 세계 최하위권이라는 지적이 20년 전부터 있었다. 그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
치료(cure)와 돌봄(care)은 다르다. 병원은 치료하는 곳이다.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돌봄이다. 돌봄은 의료 기술이 아니다. 함께 있는 것, 고통을 줄여주는 것, 혼자 두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의료 시스템에 요구하면 안 된다. 의료 시스템은 그런 구조로 설계되어 있지 않다.
병원 사망률을 낮추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원하는 방식으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어떤 사람은 집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마을의 작은 공간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호스피스 병동을 원한다. 선택이 가능하려면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에는 선택지가 없다. 병원이 유일한 기본값이다. 그것은 의료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다. 죽음을 개인과 가족이 감당할 사적 문제로 남겨둔 결과다. 죽음을 공공의 문제로 다루는 사회는 다르게 설계한다. 마을이 함께 임종을 돌보는 것, 빈집이 누군가의 마지막 공간이 되는 것, 이웃이 교대로 들러 함께 있어 주는 것. 이것은 낭만이 아니다. 설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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