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은 개인의 일이다. 그러나 그 이후는 행정의 영역이다.
싱가포르는 이 경계를 일찍 인식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개인의 생전 준비와 사망 이후 행정 절차를 하나로 연결한 정부 플랫폼을 출범시켰다. 이름은 마이 레거시(My Legacy@LifeSG). 주소는 mylegacy.life.gov.sg
엔딩노트를 넘어선 것
마이 레거시를 단순히 '정부판 엔딩노트'로 부르면 그 본질을 놓친다.
일반적인 엔딩노트는 개인이 작성하는 기록물이다. 장례 희망, 가족에게 남기는 말, 재산 정보...이것들을 종이나 파일에 적어두는 것이 전부다. 그 기록이 실제 법적·행정적 효력을 갖는지, 유족이 제때 찾을 수 있는지는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마이 레거시는 개인의 의사를 기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법적·행정적 제도와 연계된다. 쓴다는 행위가 국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다.
플랫폼의 구조, 네 가지 축
마이 레거시는 크게 네 가지 제도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지속적 포괄위임장(LPA, Lasting Power of Attorney)
치매나 사고로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했을 때를 대비해 신뢰할 수 있는 대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재산 관리와 개인 복지 결정을 위임할 수 있다. LPA 신청이 온라인으로 가능해지고 캠페인이 시작된 이후 월간 LPA 등록 건수는 두 배 이상 늘었다. 2024년 9월 기준 싱가포르 시민 중 LPA 등록자는 28만 8천 명에 달하며, 50세 이상만으로는 23만 3천 명이다.
사전 돌봄 계획(ACP, Advance Care Planning)
임종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은지, 연명 치료에 대한 의사, 돌봄 방식, 임종 장소 등을 미리 기록해두는 제도다. 2025년 7월 기준 전국적으로 완료된 ACP는 7만 7천 건을 넘어섰으며, 이는 2011년부터 2024년까지 완료된 5만 5천 건에서 40% 증가한 수치다.
2025년 7월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싱가포르 보건부와 통합돌봄청, 정부기술청이 공동 개발한 'myACP'가 출범했다. 이전까지는 ACP를 작성하려면 반드시 훈련된 ACP 조력자를 만나야 했다. myACP는 건강한 성인이 조력자 없이 온라인에서 무료로 직접 돌봄 의향을 등록할 수 있게 했다.
CPF 수급인 지정
싱가포르의 중앙연금(CPF)은 사망 시 유산 법적 절차와 별개로 지정된 수급인에게 직접 지급된다. 수급인과 지급 비율을 미리 설정해두지 않으면 복잡한 행정 처리를 거쳐야 한다. 마이 레거시는 이 지정을 플랫폼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연결했다.
유언장
국가가 직접 유언장을 등록·보관하는 시스템은 아니다. 대신 유언장 작성 방법과 보관 절차, 관련 전문가 서비스에 대한 안내를 제공한다. 법적 유언장이 필요한 영역은 민간 법률 서비스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디지털 금고(My Legacy Vault)
플랫폼의 핵심 기능 중 하나가 디지털 금고다.
마이 레거시 볼트는 금융, 건강, 법률, 장례 희망 사항을 가족과 함께 한 곳에 안전하게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은행 계좌 정보, 보험 계약, 디지털 자산 목록, 암호화폐 관련 정보, 장례 희망 사항, 가족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
접근 방식도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용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Trusted Person)'을 지정할 수 있고, 지정된 사람은 사용자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열람 시점과 권한도 사용자가 직접 설정한다.
접속은 싱가포르의 국가 디지털 신원 인증 시스템인 Singpass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회보장번호에 준하는 신원 인증이 플랫폼 전체의 보안 기반이 된다.
사망 이후, 유족을 위한 원스톱 창구
마이 레거시는 생전 준비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망 이후 남겨진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행정 절차도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였다.
병원에서 사망 사실이 등록되면 유족은 온라인으로 디지털 사망증명서를 확인하고 필요한 행정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장례 절차 안내, 정부 주택단지 내 장례 공간 사용 신청, 각종 행정기관 신고 절차 안내 등 사망 이후 필요한 업무를 통합적으로 제공한다.
슬픔과 피로가 겹치는 시간에 여러 기관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는 대신, 한 곳에서 처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이 설계의 핵심이다. 행정 지원과 함께 사별 가족을 위한 심리 상담 및 지역사회 지원 서비스 정보도 연결된다.
팔레트의 크기, 어디까지 왔는가
마이 레거시는 2020년 1월 출범 이후 약 72만 명의 고유 방문자를 기록했다.
숫자보다 더 주목할 것은 추진 방식이다. 캠페인은 보건부, 사회가족개발부, 공공서비스국, 통합돌봄청이 공동으로 주관했다. 2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와 파트너가 참여했으며, 40개 이상의 기관이 캠페인에 합류했다. 대학병원, 고등교육기관, 금융사, 지역 커뮤니티가 함께 움직였다.
병원 사망 비율도 실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2022년과 2023년 모두 62.5%였던 병원 사망 비율이 2024년에는 59.8%로 낮아졌다. 싱가포르 정부는 2027년까지 이 비율을 51%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임종을 맞이할 수 있게 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 대입했을 때. 가능한가, 필요한가
한국과 싱가포르는 구조가 다르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다. 인구 규모가 작고, 정부 시스템이 고도로 통합되어 있으며, Singpass처럼 전 국민이 쓰는 디지털 신원 인증 체계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 마이 레거시가 가능했던 것은 이 인프라 위에 얹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이미 e하늘 장사정보시스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국가 등록 시스템,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가 각각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생전 준비와 사후 행정 사이에 공백이 있고, 그 공백을 개인이 혼자 메워야 한다.
마이 레거시가 보여주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과 그 이후를 국가가 개입해야 할 공공 서비스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개인과 가족이 알아서 처리할 사적 영역으로 남겨둘 것인지의 문제다.
한국에서 무연고 사망이 해마다 늘고 있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6%를 넘었다. 디지털 유품 문제는 이미 유족 피해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준비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제도적 공백의 문제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의 마이 레거시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죽음을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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