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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죽음, 떠오르는 죽음

엔딩노트

by 다비코 2026. 10. 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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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책 속에도 있고, 지하철 안에도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앉아서 생각하는 죽음이다. 책을 읽다가, 부고 기사를 보다가,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들고 문득 떠올린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하루로 돌아온다. 이 죽음은 내가 불러냈으니 내가 돌려보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저절로 떠오르는 죽음이다. 지하철에서 어머니가 쓰시던 섬유유연제와 같은 냄새를 맡았을 때. 지울 수 없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주소록에서 보았을 때. 잠 못 드는 새벽에 내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 이 죽음은 부른 적이 없는데 온다. 생각이 되기 전에 목이 먼저 메고, 숨이 한 박자 늦게 돌아온다.

나는 오랫동안 앞의 죽음만 가까이 두려 했다. 생각은 다룰 수 있으니까. 정리할 수 있고, 거리를 둘 수 있고, 덮을 수 있으니까. 뒤의 죽음은 얼른 밀어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괜히 우울해질 것 같았고, 그런 감정에 빠지는 내가 약해 보였다.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에는 집에서 임종을 맞고 이웃이 함께 상여를 멨지만, 지금은 병원과 장례식장이 그 자리를 맡는다. 연명의료를 어떻게 할지 미리 서류로 남길 수 있게 된 지도 몇 해가 지났다. 그래도 서류에 서명하는 일과 가족에게 "내가 그렇게 되면"이라고 말을 꺼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은 하면서도 말은 하지 않는다. 머리로 하는 죽음과 마음에 떠오르는 죽음을 일부러 떼어 놓고 산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죽음이 불쑥 떠오르는 순간은 늘 소중한 것의 곁이었다. 어머니의 냄새 곁에서, 오랜 친구의 이름 곁에서, 아직 뛰고 있는 내 심장 곁에서. 아끼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잃는다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떠오르는 죽음은 불길한 예고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려 주는 신호에 가까웠다.

그래서 슬픔이 갑자기 밀려와도 자책할 일이 아니다. 한동안 괜찮다가 어느 오후에 무너지는 것은 회복이 덜 된 것이 아니라,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떠난 사람과의 관계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바꿔 계속된다. 마음속으로 말을 걸고, 그 사람이 좋아하던 노래를 틀고, 큰 결정 앞에서 "그분이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하고 떠올리는 것처럼.

옛 사람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친구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나무라자, 그는 처음엔 자신도 슬펐다고 답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계절처럼 오가는 것임을 생각하니 울음을 그쳤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담담함을 자랑하는 일화로 읽지 않는다. 슬픔이 먼저 있었고, 그 슬픔을 다 지나온 뒤에 비로소 노래가 나왔다. 슬픔을 건너뛰고 얻는 평온은 없다.

그러니 이제는 떠오르는 죽음을 쫓아내지 않기로 한다. 그것이 찾아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묻는다. 지금 내가 이토록 아끼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대개 거창하지 않다. 저녁 식탁의 온기, 말없이 곁에 앉은 사람, 내일도 같은 시간에 울릴 알람 같은 것들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결국 오늘을 확인하는 일이다. 오늘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미뤄 둔 고맙다는 말을 문자 한 줄로 보내고, 따뜻한 밥 한 끼를 천천히 먹는 것. 죽음이 우리에게 가장 정성껏 가르쳐 주는 것은 어쩌면 그 평범한 일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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