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센릉 고분과 한국의 전방후원분, 두 형태 사이의 1600년

두 무덤이 같은 모양인 이유를 묻는 것
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堺市)에는 세계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무덤이 있다. 다이센릉 고분(大仙陵古墳). 위성 사진으로 내려다보면 열쇠 구멍처럼 생긴 그 무덤은,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글다. 전체 길이 486미터. 세 겹의 해자로 둘러싸인 총 면적은 이집트 쿠푸 피라미드의 약 두 배에 달한다. 인류가 만든 가장 큰 단일 묘역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전라남도 영산강 유역에도, 같은 모양의 무덤들이 있다.
규모는 다이센릉의 수십 분의 일이다. 길이 30미터에서 길어봤자 70미터 안팎. 그러나 형태는 명백히 같다. 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글다. 현재까지 확인된 한반도 내 전방후원분은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13기 안팎. 전북 고창에서도 1기가 확인되어 총 14기 전후로 본다.
같은 시기, 같은 형태, 다른 규모. 이 두 무덤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이것이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까다로운 질문 중 하나다. 까다로운 이유는 역사적 증거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고대 한일관계의 성격 전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1. 다이센릉 고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다이센릉 고분은 5세기 전반에서 중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는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의 능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관리되고 있지만, 그게 정말 닌토쿠 천황의 무덤인지는 사실 확인된 바 없다. 궁내청(宮内庁)이 학술 발굴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이센릉은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이면서 동시에 내부가 공식적으로 발굴된 적 없는 무덤이기도 하다.
다만 그 규모와 위치로 미루어, 이 무덤의 주인이 야마토 왕권(大和王権) 최고 정점의 권력자였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전방후원분이라는 묘제 자체가 야마토 왕권의 권력을 상징하는 방식이었다. 일본 열도에서 전방후원분은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까지 약 400년간 유행했고, 규모가 클수록 더 높은 신분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일본 고훈시대(古墳時代)에 전방후원분은 지배층의 '공식 언어'였다.
다이센릉이 축조되던 5세기, 야마토 왕권은 일본 열도의 주요 지역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한반도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있었다. 백제, 가야, 신라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교섭했다. 이 시기의 왜(倭)를 소극적 섬나라로 보는 시각은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적어도 5세기의 동아시아에서 야마토 왕권은 한반도 남부 정치 지형에 깊이 개입한 세력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시기, 혹은 그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 같은 형태의 무덤이 등장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영산강의 전방후원분은 왜 거기 있는가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는 지역은 좁다. 전남 서남해안 일대, 특히 영산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의 나주, 함평, 영암, 해남, 광주 일대다. 여기에 고창이 더해진다.
이 분포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 지역이 당시 백제의 직접 지배권과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5세기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남하하면서 이 지역을 완전히 복속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영산강 유역에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독자적 집단들이 오래도록 버티고 있었다. 이 집단들은 옹관묘(甕棺墓)라는 특유의 독자적 묘제를 사용했다. 사람을 항아리에 넣어 묻는 방식인데, 이것은 다른 어디서도 이 규모로 발견되지 않는 영산강 유역만의 문화였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 전방후원분이 들어서 있다.
이 충돌이 핵심이다. 옹관묘를 쓰던 집단들 사이에서, 갑자기 일본 야마토 왕권의 상징인 전방후원분이 등장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재 학계에서 경쟁하는 설명은 크게 세 가지다.
3. 세 가지 해석과 그 함의
[해석 1] 왜인 집단 이주설
가장 직접적인 설명이다. 왜에서 건너온 집단이 영산강 유역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묘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 이 설에 따르면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은 일본계 혈통이다.
이 해석의 근거는 무덤의 형태만이 아니다. 내부 부장품에서도 일본 고훈시대 특유의 유물이 함께 출토된다. 원통형 하니와(埴輪)는 일본에서 고분 주위에 세우는 토제품인데, 한반도 전방후원분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확인된다. 무덤의 형태만 수입한 게 아니라, 부장 방식 전반이 왜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해석이 과거에 일본 식민사관, 특히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악용됐다는 것이다. '왜인이 한반도 남부에 거점을 두고 지배했다'는 주장과 연결되기 때문에, 한국 학계에서는 이 해석에 강한 거부감이 있다. 학문적 검토와 정치적 선호가 뒤섞이는 지점이다.
[해석 2] 재지 수장 모방설
영산강 유역의 토착 수장들이 스스로 전방후원분 묘제를 채택했다는 설이다. 왜인이 들어온 게 아니라, 이 땅의 지배층이 야마토 왕권과의 동맹 관계를 과시하거나 그들과의 연결을 통해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이 형태를 선택했다는 것.
이것은 묘제가 순수하게 문화적으로 전파될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로 역사에는 이런 사례가 많다. 중국 황실의 능묘 형태를 주변국이 채택하거나, 유럽 귀족이 다른 왕실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는 것처럼, 특정 묘제를 채택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동맹과 문화적 친연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이 해석은 피장자가 왜인이 아닌 영산강 유역 토착 수장임을 전제한다. DNA 분석이나 두개골 계측 등의 생물고고학적 접근이 이 질문을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는데, 아직 결정적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해석 3] 왜계 백제관료설
최근 유력하게 논의되는 가설이다. 피장자가 왜에서 건너온 혈통이되, 야마토 왕권이 아닌 백제에 복속하여 이 지역에서 관료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5세기~6세기 백제는 왜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가 왜에 불교와 한자, 각종 기술자를 보내고, 왜가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에서 왜 출신 인물이 백제의 지배 체제 안에 편입되어 영산강 유역 같은 변경 지역을 관할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전방후원분을 만든 것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왜인'이 아니라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는 왜계 관료'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임나일본부설을 피하면서도 왜인 이주라는 사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 학계가 어느 정도 합의 가능한 중간 지점을 제공한다.
4. 다이센릉과 영산강 전방후원분의 시간 관계
여기서 중요한 연대 문제를 짚어야 한다.
다이센릉 고분의 축조 시기는 대략 5세기 전반, 빠르게는 4세기 말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반도 전방후원분의 축조 시기는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즉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전방후원분 전성기보다 약간 늦게 등장한다.
이 시간 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한반도 전방후원분이 일본에서 건너온 무덤이라면, 그것은 야마토 왕권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그 문화적 영향이 바다를 넘어 영산강 유역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센릉이 5세기 야마토 왕권의 권력 정점을 상징한다면, 영산강의 전방후원분들은 그 권력의 자장(磁場) 안에서 생성된 위성 문화의 흔적일 수 있다.
반대로, 한반도 전방후원분이 순수하게 모방의 산물이라면, 이 무덤들이 만들어질 때 이미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 문화가 쇠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은 6세기 후반 이후 급격히 사라진다.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도입되면서 거대 고분 문화는 소멸한다. 즉,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이 등장할 때, 그 '원본'이 있던 일본에서는 이미 그 문화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아이러니는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왕권의 현재 권력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과의 과거 연결 또는 역사적 연대를 상징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이 무덤들은 정치적 지배의 흔적이기보다 외교적 기억의 형태일 수 있다.

5. 무덤이 말하지 않는 것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어느 해석도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피장자의 신원이다. 뼈가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어도 분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DNA 분석 기술이 발달했지만, 한반도의 기후와 토질은 유기물 보존에 불리하다. 결정적인 생물학적 증거를 얻기 어렵다.
문헌 기록도 빈약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 무덤들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일본서기』는 이 시기 한반도 관련 기사를 담고 있지만, 국가 신화와 역사 사실이 뒤섞여 있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장품 분석도 아직 진행 중이다. 전남 지역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왜식 요소와 백제식 요소, 그리고 영산강 토착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무덤들의 주인이 단일한 문화 정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 존재였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게 가장 정직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이 무덤들에 묻힌 사람들은, 단순히 '왜인'이거나 '조선인'이었던 게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정치적 거래를 중개하고 문화적 혼종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6. 2019년 이후: 유네스코와 달라진 맥락
2019년, 다이센릉을 포함한 모즈·후루이치 고분군(百舌鳥·古市古墳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것이 한국 학계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여진 이유가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해당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류 전체의 것으로 공인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 '보편적 가치'가 한반도와 긴밀하게 연결된 역사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확정될 경우, 영산강의 전방후원분들은 일본 문화유산의 지방 버전으로 자리매김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들을 독립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제대로 평가할 경우, 이 무덤들은 5세기~6세기 동아시아 교류사의 핵심 증거로 자리잡을 수 있다. 이것은 일본만의 유산도, 한국만의 유산도 아닌, 당시 동아시아 전체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공동의 기억이다.
이 맥락에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의 학술적 연구는, 단순히 고고학적 호기심을 넘어 현재의 역사 인식에 직결되는 문제다.
7. 예측: 앞으로 어떤 결론이 가능한가
모든 증거를 검토한 뒤,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역사적 관계는 이렇다.
다이센릉으로 대표되는 야마토 왕권의 전방후원분 문화는, 5세기 동아시아 정치 질서 속에서 일종의 국제적 신호 체계로 기능했다. 그 형태를 무덤에 적용하는 것은 야마토 왕권과의 연대를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들은 이 신호 체계가 바다를 넘어 수용된 결과물이다.
피장자의 출신은 단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는 왜에서 건너온 혈통일 수 있고, 일부는 토착 수장이 왜식 묘제를 선택한 것일 수 있으며, 일부는 백제의 지배 체제 안에서 활동하던 왜계 인물일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시기와 지역에 따라 혼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무덤들이 정치적 지배보다는 정치적 교섭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이센릉이 야마토 왕권이 영산강을 지배했다는 증거가 아니듯, 영산강의 전방후원분도 왜의 일방적 영향이 아니라 동아시아 각 세력이 서로를 필요로 했던 교섭과 연대의 흔적이다.
이 해석이 완전히 확정되려면 앞으로 더 많은 발굴과 DNA 분석, 그리고 한일 양국 학계의 공동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다이센릉 내부 발굴이 언제 허용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 내부가 공개될 경우 동아시아 고대사 전체가 재구성될 가능성도 있다.
나가며: 무덤의 모양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전방후원분의 모양은 이상하다.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글다는 것은 자연에서 유래한 형태가 아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결정한 형태다. 두 가지 기하학적 형태를 하나로 합쳤다.
왜 하필 그 모양인지, 사실 지금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가설이 있지만 정설은 없다. 태양과 달을 상징한다는 설, 방패 모양이라는 설, 단순히 제사 공간과 매장 공간을 구분한 것이라는 설 등.
그러나 그 이유를 몰라도, 그 무덤들이 1600년을 넘게 살아남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이센릉의 거대한 침묵과, 영산강 변의 작은 무덤들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어떤 언어로 읽을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그 무덤들은 어느 한 나라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 역시, 어느 한 나라의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았고, 두 형태가 합쳐진 무덤에 묻혔다.
어쩌면 그 무덤의 모양이, 그들이 남긴 가장 정직한 자기소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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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및 더 읽을 거리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성격」,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2018
· 임영진, 「전남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 문제」, 『한국고고학보』 65, 2007
· 박천수, 「가야·왜 교섭의 고고학적 연구」, 학연문화사, 2007
· 土生田純之 외, 「前方後円墳の出現と展開」, 학생사, 2009
· UNESCO World Heritage Committee, "Mozu-Furuichi Kofun Group: Mounded Tombs of Ancient Japan", Inscription 2019
이 글에서 제시한 '예측'은 현재 학계에서 논의 중인 가설들을 종합한 것이며, 아직 역사적으로 확정된 결론이 아닙니다. 전방후원분 연구는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