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죽는 건 괜찮다, 그런데 그다음은?

인간은 홀로 죽는다. 장례는 스스로 치르지 못한다.
정 모 씨(71)는 비혼으로 평생 혼자 살았다. 퇴직 교사이고, 집은 자기 소유다. 지방에 사는 동생과는 명절에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불화는 없었고,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는 거리를 지켜 왔다.
일 년 전부터 그는 정리를 시작했다. 옷과 책을 나눠 주고, 통장과 보험을 정리하고, 현관 서랍에 흰 봉투 하나를 넣어 두었다. 안에는 동생의 연락처와 몇 줄의 부탁이 적혀 있었다.
화장해 달라.
장례는 치르지 않는다.
재는 산에 뿌려 달라.
그는 이 일을 두려움이 아니라 홀가분함으로 했다고 이웃에게 말한 적이 있다.
매주 일요일 아침, 그는 옆집 이웃과 짧게 통화했다. 서로의 무사를 확인하는 약속이었다. 어느 일요일,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 이웃이 관리인과 함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평소 진료받던 병원은 없었고, 곁에 의사도 없었다.
그때부터 그의 마지막은 그가 준비한 순서에서 벗어났다. 경찰이 왔다. 사망 원인과 경위를 확인하기 위한 검안과 검시 절차가 필요했다. 시신을 인수할 사람도 확인해야 했다. 흰 봉투는 서랍에서 나왔지만, 그 부탁을 누가 실행할 수 있는지는 봉투 어디에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원하던 대로 혼자 죽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 가장 먼저 놓인 질문은 그가 무엇을 원했느냐가 아니었다.
누가 그의 뜻을 실행할 것인가였다.
죽음은 본래 혼자 건너는 일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우리는 홀로 죽을 것이다"라고 썼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누구도 대신 경험할 수 없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누구도 대신 건너 줄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죽음이 혼자 건너는 길이라고 해서, 죽어 가는 사람을 혼자 두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현대 사회가 죽어가는 사람을 시야에서 밀어내고, 그 곁에 머무는 법과 건넬 말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엘리아스가 말한 고립은 단순히 혼자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곁에 머무는 일을 불편해하는 사회의 상태다.
두 목소리는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쓴다. 하나는 존재의 조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상태다.
혼자 죽는다는 사실과 홀로 버려졌다는 사실은 다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제도가 이 둘을 충분히 가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죽음이 가족의 일이 된 시간
죽음의 장소는 달라졌다. 2002년에는 집에서 숨진 사람(45.4%)이 병원에서 숨진 사람(43.4%)보다 많았다. 하지만 2017년에는 병원에서 숨진 사람이 76.2%로 늘었고, 집에서 숨진 사람은 14.4%로 줄었다.
2025년 잠정 통계에서도 사망자의 75.7%는 의료기관에서, 14.5%는 집에서 숨졌다. 이제 죽음은 대부분 병원에서 시작해 병원 장례식장으로 이어진다.
죽음이 병원으로 옮겨 가면서 임종과 사망 확인, 장례가 이어지는 표준 경로도 자리 잡았다. 의사가 임종을 확인하고,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지고, 가족이 장례를 맡는다. 의료와 가족이 함께 만드는 사건이 된 것이다.
이 경로는 한 사람이 병원에서 가족에게 둘러싸여 숨진다는 전제 위에 놓여 있다. 그 전제가 현실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서, 의사 없이, 혼자 숨진 죽음은 이 경로 밖에 놓인다.
의료기관 밖에서 숨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변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사가 사망 원인과 경위를 확인하기 어렵거나 범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우면 변사로 다뤄져 수사기관의 현장 확인과 검시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
사망 원인이 분명하고 평소 진료 관계가 확인된 죽음과 달리, 의사가 현장에 없고 사망 경위가 불명확한 죽음에는 확인 절차가 더 많이 붙는다. 경찰의 현장 확인, 검안과 검시, 시신 인수, 장례 주관이 차례로 문제 된다.
홀로 숨진 집에 의사보다 경찰이 먼저 호출되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현재의 사망 확인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가깝다. 제도는 그 사람이 혼자 사는 삶을 얼마나 만족했는지, 어떤 장례를 원했는지를 먼저 묻지 않는다.
우선 사망의 원인과 경위를 확인한다. 그다음에는 시신을 인수하고 장례를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진다.
혼자 사는 사람들, 선택과 사정이 뒤섞여 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많아졌다. 1인 세대는 2024년 처음 천만 세대를 넘었고, 2025년 말에는 1,027만 세대로 늘어 전체 세대의 42.3%(주민등록 기준)를 차지했다. 다섯 세대 중 두 세대 이상이 혼자 산다.
이들이 혼자 사는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다. 배우자를 잃어서 혼자가 된 사람도 있고, 학업이나 직장 때문에 독립한 사람도 있다. 혼자 살고 싶어서 혼자가 된 사람도 있다.
밀려서 혼자가 된 사람과 스스로 택한 사람이 한 통계 안에 섞여 있다.
혼자 사는 일이 모두 불행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혼자라서 편하고,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어 만족한다. 함께 살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가족과 친구, 이웃과 느슨하지만 안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외로움의 위험은 더 크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통계로 보는 1인가구'에 따르면 1인가구의 48.9%가 평소 자주 또는 가끔 외롭다고 답했다. 전체 가구(38.2%)보다 10.7%포인트 높은 수치다.
혼자 산다는 사실이 곧 외로움이나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혼자 사는 상태와 관계가 끊긴 상태가 어떤 사람에게는 겹칠 수 있다. 이 둘을 구분하면서도, 겹치는 사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혼자 죽는 삶은 실패가 아니다
정 모 씨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통장과 보험을 정리했고, 옷과 책을 나누었고, 남은 사람에게 부탁을 남겼다. 그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살았고, 마지막에도 가능한 한 타인의 부담을 줄이려 했다.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혼자 살고 혼자 죽기를 원했다는 사실과, 그가 죽은 뒤 그의 의사를 실행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혼자 죽는 삶은 실패가 아니다. 가족이 없거나 적다는 사실도 그 자체로 실패가 아니다.
실패에 가까운 것은 한 사람의 의사가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그것을 실제 절차로 옮길 통로가 좁거나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마지막을 가족만이 연결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제도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모두 예외로 만든다. 비혼자, 자녀가 없는 사람, 가족과 단절된 사람, 가족이 있지만 장례를 맡기 어려운 사람, 친구나 이웃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모두 이 전제의 바깥에 놓일 수 있다.
흰 봉투에 연락처와 부탁을 적어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부탁을 누가 전달하고, 누가 시신을 인수하며, 누가 화장과 유골 처리를 진행할 수 있는지까지 연결돼야 한다.
개인의 의사는 기록으로 남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실행할 사람과 절차를 만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장례는 스스로 치르지 못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사망 이후의 절차는 개인적이지 않다. 사망 확인, 검안과 검시, 시신 인수, 장례 방식 결정, 화장이나 매장, 유골 처리와 행정 신고가 이어진다.
이 과정은 누군가가 책임지고 선택하고 연락해야 움직인다.
현재의 제도는 그 역할을 가족이 맡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역할이, 가족이 없거나 가족에게 맡기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행정적 공백이 된다.
법이 전혀 닫혀 있는 것은 아니다. 장사법이 정한 연고자는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등 혈연 중심이다. 2023년 개정으로 무연고 사망자에 한해, 오랜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본인이 문서나 유언으로 지정한 사람이 장례의식을 주관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이 길은 연고자를 확인한 뒤 무연고 사망자로 확정된 경우에만 열린다. 연고자가 있는 사람은 생전에 누구를 지정했든 장례의 결정권이 먼저 연고자에게 간다. 사망진단서 발급 신청 자격 같은 실무 장벽도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 공백을 '고립사'라는 한 단어로만 부르면 문제가 흐려진다. 혼자 살면서도 매일 이웃과 연락하고, 친구에게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 장례나 화장 같은 마지막 절차를 맡을 사람을 정해 둔 사람도 있다. 반대로 가족과 함께 살아도 관계가 단절된 채 고립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혼자 사는 사람을 모두 위험한 사람으로 분류하는 일이 아니다. 혼자 사는 상태와 사회적 고립, 사망 발견까지 걸린 시간, 마지막 절차를 맡을 관계망, 본인의 의사를 실행할 제도적 통로를 나누어 살피는 일이다.
정 모 씨의 흰 봉투에는 그의 뜻이 들어 있었다. 장례를 치르지 말라, 화장해 달라, 재는 산에 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제도는 그 뜻을 실행할 사람보다 먼저, 시신을 인수하고 사망 절차를 이어 갈 연고자를 찾았다.
그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연고자가 있는 한 그는 무연고 사망자가 아니었고, 생전에 지정한 지인에게 장례를 맡기는 길도 열리지 않았다. 매주 안부를 나누던 이웃이 그의 뜻을 가장 잘 알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뜻이 지켜질지는 남은 가족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그 질문은 앞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연고자가 있는 사람의 마지막 뜻을, 가족이 아닌 사람이 맡을 수 있는가.
친구와 이웃은 어디까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생전에 남긴 장례 의사는 어떤 절차를 통해, 누구의 동의 아래 실행되는가.
가족이 없는 사람의 마지막 절차를 사회는 어디까지 함께 책임질 것인가.
혼자 사는 삶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마지막 순간에도 가족이라는 하나의 형식으로만 번역하려는 제도일 수 있다.
인간은 홀로 죽는다.
그러나 홀로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가족이 아닌 사람의 마지막을 함께 맡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