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엔딩

한국과 대만은 왜 다른 길을 갔을까

다비코 2026. 8. 17. 13:33

 

같은 식민지 법제, 다른 선택

 

한국과 대만, 두 나라 모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기간도 비슷하다. 한국은 35년, 대만은 50년. 두 나라 모두 해방 후 자기 정부를 세우고, 식민지 시대 법령을 손보며 새로운 법체계를 만들었다. 장묘에 관한 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딱 하나, 결정적으로 갈라진 지점이 있다. 시신을 묻는 것과 화장한 유골을 묻는 것을 부르는 이름이다.

 

대만은 일본을 그대로 따라갔다. 시신을 묻으면 埋葬, 화장한 유골을 묻으면 埋藏. 대만 「빈장관리조례」를 열어보면 지금도 이 구분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埋葬屍體, 應於公墓內爲之(시신을 埋葬하는 것은 공동묘지 안에서 해야 한다)"라고 하다가, 화장한 골회 이야기가 나오면 슬쩍 "屬埋藏骨灰者(埋藏에 해당하는 골회)"로 글자를 바꿔 부른다. 藏은 蔵의 정자체일 뿐이니, 일본의 埋葬/埋蔵과 완전히 같은 그림이다.

 

한국은 정반대로 갔다. 1961년 첫 법을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시신이든 유골이든 그냥 '매장'이다. 한자로는 埋葬 하나뿐이다. 蔵이라는 글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 비슷한 경로로 법을 물려받은 두 나라가 왜 이렇게 다른 선택을 했을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이건 어디까지나 추리에 가깝다. 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따라가 보면 꽤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단서 1. 화장이 너무 드물어서, 구분할 필요조차 없었다

 

1915년 경성부의 화장률을 아는가? 4.6%다. 그것도 전국에서 높은 축에 속했다. 같은 시기 경상남도 전체 화장 건수는 160건, 평안남도는 단 3건. 화장은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다.

 

1961년 법이 만들어질 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법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100건 중 95건 이상이 시신을 그대로 묻는 매장이고, 화장 유골 처리는 어쩌다 한 번 있는 예외라면, 굳이 그 예외를 위해 별도의 동사를 하나 더 만들 이유가 있을까? 그냥 "매장 안에 유골도 포함되는 걸로 하죠" 하고 넘어가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반면 일본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화장이 상당히 보편화된 사회였다. 화장이 예외가 아니라 흔한 일이 되면, 그걸 부르는 정교한 언어가 자연스럽게 필요해진다. 언어는 결국 자주 쓰이는 것에서 정교해지는 법이니까.

 

단서 2. 화장은 '왜색(倭色)'이었다

 

이게 좀 더 재미있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화장을 '왜장(倭葬)'이라 불렀다. 왜인의 장례라는 뜻이다. 실제로 일제가 세운 화장장은 애초에 한반도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조선인에게도 화장을 권장하긴 했지만, 사람들은 이걸 자기네 전통이 아니라 남의 나라 관습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정서 속에서 상상해보자. 해방 후 한국 법을 만드는 사람이, 일본의 장묘법을 참고하면서 "시신은 埋葬, 유골은 埋蔵으로 부릅니다"라는 세밀한 구분까지 그대로 들여오고 싶었을까? 법 전체의 큰 틀, 그러니까 총칙-정의-시설규율 같은 뼈대는 참고할 만했을지 몰라도, 화장이라는 '왜색 관습'을 처리하는 정교한 언어 체계까지 굳이 정성 들여 이식할 유인은 크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기존에 익숙한 '매장'이라는 단어 안에 뭉뚱그려 넣고 넘어가는 편이, 심리적으로도 더 편했을지 모른다.

 

단서 3. 조선의 '매장'은 원래부터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조선시대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또 다른 실마리가 보인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매장은 거의 유일하게 정당한 장례 방식이었다. 화장은 불교식이라며 국가가 대놓고 금지했을 정도다.

 

이런 전통 속에서 '매장'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고인을 정식으로 장사 지내는 행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꽤 포괄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다 화장을 하더라도, 결국 그 유골을 땅에 묻는 이상 여전히 "장사를 지낸다"는 큰 범주 안에 있는 것이지, 별개의 절차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어 蔵이 담고 있는 '그냥 보관해둔다'는 무심한 뉘앙스는, 애초에 조선의 상장례 인식 체계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발상일지도 모른다.

 

단서 4. 혁명 직후의 급한 입법, 디테일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조금 현실적인 이유도 하나 얹어보자. 1961년은 5·16 군사정변 직후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법령을 새로 정비하던, 그야말로 정신없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의 입법은 보통 큰 틀을 빠르게 세우는 데 집중하지, 언어 하나하나의 정교함까지 살뜰히 챙기기는 어렵다. 조선총독부령을 없애고 그 자리를 메울 법이 시급했던 상황에서, 일본법의 전체 구조는 가져오되 埋葬/埋蔵 같은 미세한 한자 구분까지 재현하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래서, 결론은?

 

네 가지 단서를 겹쳐보면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화장이 워낙 드문 예외였던 사회, 그 예외가 하필 '왜색'으로 낙인찍혀 있던 사회, 그리고 애초에 '매장'이라는 말 자체가 장례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으로 굳어 있던 사회. 여기에 급박한 입법 일정까지 겹치면서, 한국은 일본이 정교하게 나눠놓은 埋葬/埋蔵 구분을 굳이 따라갈 이유도, 여유도 없었던 게 아닐까.

 

반면 대만은 사정이 좀 달랐을 수 있다. 대만은 한국보다 15년이나 더 긴 50년간 통치를 받았고, 그만큼 일본식 행정·법률 체계가 훨씬 깊게 뿌리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화장에 대한 감정적 거부감이 한국만큼 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차이들이 쌓여, 대만은 埋葬/埋藏이라는 일본식 틀을 그대로 물려받아 지금까지 쓰고 있는 반면, 한국은 그 틀을 걷어내고 자기 식으로 다시 뭉쳐버린 것 아닐까.

 

물론 이 모든 건 정황을 따라간 추리일 뿐, 당시 국회 회의록에 "우리는 이런 이유로 埋葬으로 통합하기로 했습니다"라고 적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같은 식민지, 비슷한 시기, 비슷한 법 계승 경로를 거치고도 언어가 이렇게 정반대로 갈렸다는 사실 자체가, 법이라는 게 단순히 조문을 베끼는 작업이 아니라 그 사회의 정서와 역사가 은근히 스며드는 과정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한 글자 차이 같아 보이는 埋葬과 埋藏 사이에, 사실은 두 나라가 화장을, 그리고 일본을 받아들인 온도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 중국, 동사는 공유하되 대상은 항상 밝힌다

중국 「장묘관리조례」는 "埋葬遗体(시신을 매장한다)", "埋葬骨灰(골회를 매장한다)"처럼 埋葬이라는 동사는 공유하되, 대상어인 유체(遗体)와 골회(骨灰)는 조문마다 구분해서 명시한다. 한국이 "시신이나 유골"을 하나의 정의문에 병렬시키는 것과 달리, 중국은 시신을 묻는 경우와 유골을 묻는 경우를 별도 항목으로 나눈다. 동사는 통일하되 대상은 매번 밝히는 절충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