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의 유전자

조산(造山) 밑에서 시작된 이야기
한양이 조선의 도읍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청계천 변에는 이상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바늘로 얼굴을 찔러 그 상처에 먹물을 새겨 넣는 자자형을 받은 사람들, 갈 곳 없는 거지들, 무뢰배로 낙인찍힌 이들이었다. 이들은 청계천에 쌓인 모래와 흙을 긁어모아 인공 언덕 '조산'을 만들고, 그 아래 굴을 파서 패거리를 이루어 살았다.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이 사람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잔칫날과 명절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구걸을 했고, 때로는 뱀을 잡아 팔았다. 그리고 돈이 조금 모이면,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업종에 뛰어들었다. 바로 상여도가, 오늘날의 장의사였다.
왜 하필 장례였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시신을 다루는 일은 유교 사회에서 가장 꺼려지는 일이었다. 이미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틈새였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떠맡으며 생계를 잇고 자본을 쌓아간 것이다.
이 상여도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가 방상시였다. 장례 행렬의 맨 앞에서 수레를 타고 가며 잡귀를 쫓고, 묘 앞에서는 시신을 묻는 구덩이의 악귀까지 쫓아내는 역할이었다. 한 번 쓴 탈은 그 자리에 묻거나 태워버리고, 장례가 있을 때마다 새로 만들어 썼다. 이 풍습은 멀리 중국 주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우리 역사 속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조선까지 살아남은 오래된 의식이었다.
마을의 '계'와 도시의 '가게'
물론 상여도가만이 조선의 장례를 책임진 것은 아니다. 고려 말부터 향도라는 이름의 상례 전문 집단이 있었고, 이후 상두계·상포계·위친계 같은 마을 단위의 '계'로 이어지며 서로 부조하고 상여를 조달하는 방식으로 장례 전체를 함께 치렀다. 시골에서는 이런 공동체적 부조가 잘 작동했다.
하지만 서울이나 수원 같은 도시는 사정이 달랐다. 이웃 간의 유대가 마을만큼 촘촘하지 않았던 도시에서는, 결국 돈을 받고 장례를 전문적으로 대행해주는 업소가 필요해졌다. 상여도가는 그 빈틈을 메운 도시형 서비스업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 속의 흔적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우리가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 '깍쟁이'가 바로 이 집단에서 나왔다. 원래 '깍정이'는 청계천이나 마포 근처에서 거처 없이 떠돌며 구걸하거나, 상여 앞에서 잡귀 쫓는 시늉을 하고 돈을 받던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산에 살며 방상시 노릇을 하던 그 무뢰한들의 별명이, 세월이 흐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얄미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가장 천대받던 직업군을 부르던 이름이, 수백 년이 지나 누군가의 야박한 성격을 놀리는 일상어가 되었다는 사실. 여기에 이 이야기의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낙인에서 근대화까지
이 흐름이 완전히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상례'라는 말 대신 '장의'·'장례'라는 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불교와 기독교식 장례가 늘면서 종교 의식으로서의 장례가 일반화됐다. 도시의 공동 주택이 늘면서 상을 치르는 공간도 집에서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갔다.
일본이 자국식 장의사 제도를 들여오면서 기존 상여도가는 큰 위기를 맞았지만, 이들은 상여 대신 영구차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시대에 적응해갔다. 죄인과 거지의 후예로 시작된 업종이, 결국 근대적 서비스업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장례업에 대한 낙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유교 사회에서 죽음은 단순한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일정 기간 피해야 하는 '부정'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시신을 직접 다루는 일 역시 자연스럽게 기피 대상이 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이러한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사회에서 이미 배제되어 있던 죄인, 거지, 부랑민 등 최하층민이었다. 즉 죽음을 다루는 일이 천해서 그들이 맡게 된 것이지, 그들이 맡았기 때문에 천한 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1. 유교적 금기 죽음과 시신을 다루는 일은 꺼려지고 천한 일로 인식된다.
2. 기피 직업화 일반인은 이를 피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최하층민이 생계를 위해 그 자리를 맡는다.
3. 신분의 낙인 담당자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장례업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한다.
4. 생계의 압박 낙인 속에서 불안정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일부는 상주의 효심과 죄책감을 이용해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거나 불필요한 절차를 권하는 등 문제적 관행을 보이기도 했다. 상을 치르는 유족은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 이를 거절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구조는 착취가 발생할 여지를 만들었다.
5. 인식의 재강화 이러한 사례들은 장례업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굳히는 근거가 되었고, 기존의 사회적 낙인을 다시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는 원인과 결과가 한 방향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이었다. 장례업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개인의 도덕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교적 금기와 신분제 사회, 그리고 낙인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불안정한 생계가 맞물려 형성되고 재생산된 사회 구조의 산물로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가장 낮고 어두운 곳, 조산의 굴에서 시작된 손길이, 인간 삶의 가장 엄숙한 마지막 문을 닫아주는 손길이 되기까지.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낙인은 흐려지고 이름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