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을 나눈다는 것
유골을 나눈다는 것 - 사리 분배로 보는 불교의 오래된 지혜

다툼에서 시작된 '나눔'
기원전 5세기,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여덟 나라의 왕들이 사리(舍利)를 서로 차지하겠다며 대립했다. 자칫 전쟁으로 번질 뻔한 이 갈등을 잠재운 것은 한 수행자의 중재였다. 그는 사리를 여덟 나라에 공평하게 나누자고 제안했고, 각 나라는 자신의 몫을 가지고 돌아가 탑을 하나씩 세워 봉안했다. 이렇게 세워진 여덟 개의 탑을 '근본8탑(根本八塔)'이라 부른다. 불교사에서 최초로 세워진 불탑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날의 중재가 단순히 갈등을 봉합하는 임시방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유골은 반드시 한곳에 온전히 모아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나누어도 그 신성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이다. 불교는 후자를 택했고, 이 선택이 이후 2,500년간 아시아 전역의 장례·추모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아소카왕, 8만 4천 개로 나누다
근본8탑이 세워지고 2~3백 년이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왕이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한 곳을 제외한 근본8탑을 모두 해체해 그 안의 사리를 다시 꺼냈고, 이를 인도 각지에 무려 8만 4천 개의 불탑으로 재분배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8만 4천 기를 문자 그대로 세웠다기보다는 "셀 수 없이 많이 세웠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되지만, 핵심은 분명하다. 사리는 한 번 나뉜 뒤에도 또다시 나뉠 수 있었고, 나뉠수록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부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 발상이 이후 각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어졌는지 살펴보자.
스리랑카 - 치아사리 하나로 나라를 지키다
스리랑카 캔디의 불치사(佛齒寺)에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돼 있다. 4세기 중엽, 인도 칼링가 왕조에서 전란을 피해 헤마말라 공주가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치아사리를 숨겨 스리랑카로 옮겨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 사리를 받은 시리메가완나 왕은 백마가 끄는 수레에 안치해 도심을 순례했고, 이후 이 의식은 매년 열리는 페라헤라 축제로 이어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치며 승려가 한 명도 남지 않을 정도의 법난을 겪었지만, 이 치아사리만큼은 끝까지 지켜냈다. 스리랑카인들에게 치아사리는 곧 부처님 그 자체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미얀마 - '불탑의 나라'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불탑 신앙이 활발한 나라로 꼽힌다. 1453년 건립된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에는 부처님의 유품과 머리카락이 봉안돼 있으며, 둘레 426m, 높이 100m에 달하는 이 탑은 오늘날까지 미얀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산 정상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짜익티요 파고다(황금바위탑) 역시 미얀마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순례지 중 하나로, 사리 신앙이 국토 전역의 지형과 결합된 독특한 사례다.
중국 - 법문사의 손가락뼈 사리
중국 산시성 법문사(法門寺)에는 부처님의 손가락뼈 사리로 알려진 불지사리(佛指舍利)가 봉안돼 있다. 첫 출처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당나라 시절부터 황실이 직접 친견 행사를 열 만큼 극진히 예우받아온 유물이다. 당나라 유학승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사리 150과를, 의정(義淨)이 300과를 각각 중국으로 가져왔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중국 역시 인도로부터 사리를 '나눠 받는' 방식으로 불교 신앙의 물리적 거점을 넓혀갔음을 알 수 있다.
한국 - 적멸보궁과 자장율사
한국 불교에서도 사리 분배의 흔적은 뚜렷하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636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정골(頂骨) 사리를 모시고 귀국했다. 이 사리는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등 이른바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나뉘어 봉안됐다. 적멸보궁은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에는 따로 불상을 두지 않는 관례로 유명한데, 부처님의 사리 자체가 곧 부처님이므로 형상화된 대체물이 필요 없다는 논리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불교계에서도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사리 중 어느 것이 '진짜' 진신사리인지는 학술적으로 확언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종종 지적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적 진정성은 그 사실 여부와 별개로 수백 년간 이어져 왔다.
나눔이 남긴 것
근본8탑에서 시작해 8만 4천 탑, 그리고 스리랑카·미얀마·중국·한국 각지의 사리탑으로 이어지는 이 오랜 흐름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사랑하는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 유골은 반드시 한곳에 있어야 하는가?"
불교의 답은 명확했다. 나눔은 훼손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사리가 여러 나라, 여러 탑으로 흩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앞에서 예를 표할 수 있었고, 그것이 곧 신앙 공동체를 넓히는 방식이었다.
2,500년을 건너온 발상 - 테모토쿠요와 키프세이크 유골함
이 '나눔은 훼손이 아니라 확장'이라는 발상은 형태를 바꿔가며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일본의 分骨(분코쓰) 전통이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고야산이나 혼간지 같은 종파의 본산에 유골 일부를 분골해 납골하는 관습이 있었다. 사리를 나눠 여러 나라에 봉안했던 방식이, 시대를 지나며 '고인의 유골을 본산과 가족 묘, 그리고 자택'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축소·전이된 셈이다.
이 오래된 관습이 21세기 들어 하나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재탄생한 것이 手元供養(테모토쿠요)다. 2002년 교토의 야마자키 조지가 아버지의 말기암 선고를 계기로 유골을 도자기 지장보살상에 담아 곁에 두고 공양하기 시작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는데, 이는 사실 "유골이 한곳에 있어야만 온전하다"는 통념을 깨는 시도였다. 사리가 여덟 나라로 나뉘어도, 8만 4천 개로 흩어져도 그 신성함이 줄어들지 않았듯, 고인의 유골 한 줌을 가족 각자가 나눠 갖는다고 해서 추모의 진정성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이 산업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서구의 키프세이크 유골함(keepsake urn) 문화도 같은 논리 위에 서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배우자가 메인 유골함을 보관하고, 성인 자녀들이 각자 작은 키프세이크 유골함을 하나씩 갖는 방식이 흔하다. 유골을 펜던트나 목걸이에 담아 몸에 지니는 크리메이션 주얼리(cremation jewelry)도 널리 쓰인다. 이 역시 "고인은 한 곳에 안치되어야 완전하다"는 전제를 벗어나, 슬픔의 방식과 애도의 속도가 저마다 다른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자기만의 거처'를 마련해주는 접근이다.
흥미로운 대조점도 있다. 가톨릭교회는 오랫동안 유골을 나누는 것을 신학적으로 금지해왔다. 인간의 몸은 부활을 기다리는 온전한 단위여야 한다는 교리 때문이었다. 2016년 바티칸 지침은 유골을 친지들끼리 나누거나 장신구에 넣는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했고, 2023년에 이르러서야 고인에게 의미 있는 장소에 극소량을 보관하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즉 '유골은 나뉠 수 없다'는 입장과 '나눠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종교 전통에 따라 지금도 팽팽하게 갈려 있는 셈이다.
결국 근본8탑에서 아소카왕의 8만 4천 탑, 그리고 오늘날의 테모토쿠요 상품과 키프세이크 펜던트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것은 하나의 태도다.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도자기 지장보살상이 되기도 하고, 손바닥만 한 은빛 펜던트가 되기도 했지만, "나눈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만큼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형태는 종교의 상징에서 개인의 추모품으로 옮겨갔어도, 그 밑바탕의 정서는 놀라울 만큼 한결같이 이어져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