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동에 파크골프장 대신 지어야 할 것
2003년 지켜지지 않은 약속, 그리고 16년째 방치된 땅에 대하여

2003년, 서초구 원지동 주민들은 하나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화장장을 지어도 좋다, 대신 국립의료원을 유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처리하는 시설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삶을 돌보는 시설을 얻는 셈이었다. 나쁘지 않은 거래처럼 보였다.
주민들은 6년간 법정에서 싸우다 결국 이 약속을 믿고 물러섰다. 2011년, 화장로 15기를 갖춘 서울추모공원이 준공됐다.
그리고 병원은 오지 않았다.
국립중앙의료원 이전 사업은 16년을 표류했다. 경부고속도로 소음 문제였다는 이유로, 정부는 2020년 계획을 공식 철회하고 이전지를 서울 중구로 바꿨다. 화장장은 약속대로 들어섰는데, 그 대가로 받기로 했던 병원은 다른 동네로 가버렸다. 거래의 절반만 이행된 것이다.
그 이후 원지동엔 넓은 유휴부지만 남았다. 옛 국립중앙의료원 부지 예정지는 16년째 아무것도 짓지 못한 채 비어 있다. 최근 나온 활용안이 9홀짜리 임시 파크골프장이라고 한다. 오래 방치된 땅을 시민에게 열어준다는 점에선 나쁘지 않다. 하지만 16년을 기다린 자리의 최종 답이 임시 체육시설이라면, 이 동네는 여전히 아무 비전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곳으로 남는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보려 한다. 이 빈 땅에, 대체 무엇을 지어야 하는가.
안치와 장례는 다른 일이다
한국에서 사람이 죽으면 벌어지는 일을 한번 떠올려보자. 사망 직후, 유가족은 슬픔에 잠긴 채 몇 시간 안에 장례식장을 정하고,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 일정을 잡고, 화장 예약까지 끝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정신없는 순간에, 가장 많은 결정을 한꺼번에 강요받는 셈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병원이 삶을 치료하는 곳인 동시에 죽음 이후의 절차가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안치와 조문, 장례가 병원 장례식장이라는 하나의 공간, 하나의 흐름 속에 뭉뚱그려져 있다. 오래 그래왔다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은 아닌데도.
안치(고인을 안전하게 보존·관리하는 일)와 장례(유가족이 고인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사회·문화적 과정)는 본질적으로 다른 기능이다. 안치는 국민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제공돼야 할 공공서비스고, 장례는 유가족이 시간을 갖고 선택할 문제다. 지금 구조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가족은 안치 기간(빈소 임대 일정)에 쫓겨 장례 방식을 서둘러 정하고, 병원 장례식장은 접객업 수익 구조에 의존한다.
이걸 분리하면 어떻게 될까. 사망이 확인되면 고인은 먼저 전문 안치센터로 안전하게 옮겨지고, 유가족은 급하게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해외에 있는 가족을 기다릴 수도, 가족들이 상의해서 3일장이든 가족장이든 원하는 방식을 고를 수도 있다. 이건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유가족에게 애도하고 결정할 시간을 돌려주는 문제다. 외국인 사망자의 본국 송환을 위한 엠바밍 같은 전문 서비스도, 무연고·저소득층 사망자를 위한 공영 장례도 이 시설을 축으로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운영은 국가·서울시가 기준과 수가를 표준화하고, 실제 운영은 자격을 갖춘 민간기관에 위탁하는 구조를 생각한다. 응급의료 이송체계나 사회복지시설 위탁 운영과 비슷한 그림이다. 인근 병원의 안치 기능을 먼저 위탁받는 것부터 시작해, 서울 동남권 병원들이 공동으로 쓰는 광역 거점으로 키워갈 수 있다.


추모를 '자연장'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전문 안치센터가 '죽음 직후'를 책임진다면, 그 이후 '기억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담당할 시설도 필요하다. 이걸 서울추모식물원이라 부르기로 했다. 3만㎡ 규모의 반구형 온실이고, 입장료는 없다. 문은 매일 오전 6시에 연다.
이름을 이렇게 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입구에 '산분장'이나 '자연장'이라고 써 붙이는 순간, 이곳은 특별한 마음을 먹어야 찾아가는 공간이 된다. 대신 '서울추모식물원'이라 부르면, 유모차를 끌고 산책 삼아 들르는 곳이 될 수 있다. 무료 입장과 이른 개장 시간은 이 공간이 일상의 목적지가 되기를 바라는 설계다.
내부는 다섯 구역으로 나눈다. 가장 안쪽 중앙 대온실은 이름 없는 거대한 나무들이 여러 사람의 기억을 함께 품는 익명형 공동 산분 구역이다. 누구 한 사람의 나무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깃든 숲이다. 그 옆 사계절관은 가족이 지정한 나무나 화분에 고인의 유골재 토양을 직접 쓰는 수목장 공간, 계절마다 다른 꽃이 가족의 방문을 맞는다. 수생·정원관은 수련과 창포가 핀 연못의 수중 산분공간, 고산·암석원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자연의 순환으로 체험하는 자연형 봉안공간이다. 입구 쪽 맞이관엔 카페와 상담실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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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원지동인가
원지동은 서울에서 흔치 않은 조건을 갖고 있다. 강남권과 인접해 접근성이 좋고, 서울추모공원이라는 화장시설이 이미 돌아가고 있어 관련 서비스를 모으기 좋다. 무엇보다 공공시설과 민간시설을 나눠 배치할 만큼 넓은 유휴부지가 남아 있다. 서울 안에서 이런 조건을 다 갖춘 땅은 드물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포레스트 론(Forest Lawn Memorial Park)은 1917년부터 묘지를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니라 공원, 미술관, 문화공간을 결합한 복합 공간으로 재구성해 하나의 문화적 목적지가 됐다. 말레이시아의 니르바나 메모리얼 파크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두 사례가 보여주는 건 하나다. 혐오시설 자체가 가치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주변에 어떤 문화와 서비스를 결합하느냐가 새로운 수요를 만든다.
다만, 이 모델을 그대로 베끼면 안 되는 이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포레스트 론식 모델은 결국 희소성과 프리미엄 서비스를 파는 구조다. 더 좋은 공간, 더 많은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이 낸다. 이 논리를 원지동에 그대로 옮기면 '죽음마저 계급화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제안의 출발점은 형평성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인프라도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중 구조를 제안한다.
한 구역엔 공공형 전문 안치센터를 둔다. 국가가 수가와 기준을 표준화해, 소득과 무관하게 누구나 일정 수준의 서비스를 받도록 한다. 다른 구역엔 민간 자본이 참여하는 추모문화지구를 둔다. 프리미엄 봉안시설, 장례 컨시어지, 유가족 숙박시설(안치 기간 중 고인과 함께 머무는 개념), 문화·예술 공간 등을 결합해 다양한 수요를 받는다.
이 두 축이 그냥 나란히 존재하기만 하면 결국 계층 분리로 끝난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연결한다. 민간 개발사업자의 토지 임대료, 개발부담금, 운영수익 일부를 공공기금으로 환류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서울시 재건축 사업의 공공기여 협상 관행이나 해외의 인클루저너리 조닝을 벤치마크로 삼아, 운영수익의 10~15% 수준을 환류 비율의 출발점으로 제안한다. 이 재원은 공공형 안치센터 운영, 저소득층 장례비 지원,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장례복지 인력 양성에 우선 쓴다. 안치센터도 표준 수가만으로 운영비를 다 메우는 건 아니고, 남는 결손은 이 환류금으로 보전하는 구조다. 재건축에서 공공기여를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원리를, 장례 인프라에 적용하는 것뿐이다.
지역에 대한 보상
원지동 주민에겐 실질적 보상이 필요하다. 2003년 정부가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계약으로서다. 개발이익 일부를 지역기금으로 조성하고, 공원과 문화시설을 주민에게 우선 개방하고, 지역주민을 우선 채용하고, 교통·생활 인프라 개선에 재원을 쓴다. 그래야 주민들은 시설을 그저 감내하는 게 아니라, 개발의 실질적 수혜자가 된다.
다른 동네였다면 주민들이 "왜 우리 동네냐"고 물었을 것이다. 원지동에서는 "그동안 감당한 부담에 어떤 새로운 가치를 더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맞다.
남은 일
부지 소유 구조와 도시계획 용도지정 검토,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허용하는 민간시설 범위 재설계, 환류 비율에 대한 사회적 합의, 무엇보다 공공성과 시장성의 균형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 이건 이 모델의 성패를 가를 핵심 쟁점이고,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민간 개발 공모와 재원 모델을 확정하는 단계도 마찬가지다. 이 지점들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시기를 못 박는 건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로드맵의 뒷단은 일부러 넓게 잡았다.
성공의 기준은 화려한 민간시설을 얼마나 많이 짓느냐가 아니다. 고급 서비스를 원하는 수요가 공공 장례복지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하고, 지역사회가 그 성과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인프라도 누구에게나 존엄해야 한다.
민간 개발이 공공을 잠식하는 게 아니라, 민간 개발이 공공을 지탱하는 구조. 이게 원지동 추모지구 구상의 진짜 목표다. 혐오시설을 지역의 부담에서 공동체의 자산으로 바꾸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