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사진만 남은 빈소

고인은 어디로 갔는가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영정사진과 마주한다. 환하게 웃는 얼굴 앞에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절을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이 사진 속의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고인은 빈소에 계시지 않는다. 지하나 별관의 안치실, 차가운 냉장 시설에 홀로 계신다. 가족과 조문객은 사진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정작 고인은 그 자리에 없다. 우리는 이 풍경에 너무 익숙해져 낯섦조차 느끼지 못한다.
한국 장례산업의 문제로 흔히 높은 비용과 불투명한 가격, 업체의 영세성이 거론된다. 모두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이 문제들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더 근본적인 변화가 놓여 있다. 장례의 주인공이 장례의 한가운데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이다.
곁을 지킨다는 것
본래 장례는 죽은 이를 모시고 산 사람들이 그 죽음을 함께 확인하며 작별하는 의례였다. 가족은 고인의 곁을 지켰고, 조문객은 고인 앞에서 직접 예를 올렸다.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통과하며 사람들은 비로소 이별을 시작했다.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건네는 동안, 죽음은 머릿속의 사실에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이 되었다.
빈소(殯所)라는 이름도 그 뜻을 품고 있다. 고인을 모시고 그 곁에서 마지막 예를 갖추는 곳이다. 그러나 고인이 없는 빈소에는 사진과 제단, 의자와 음식상만 남는다. 빈소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던 고인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시설은 커지고 마음 둘 곳은 좁아졌다
고인이 빈소를 떠나자 빈소의 쓰임도 달라졌다. 빈소는 크기와 등급으로 나뉘는 임대 공간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조문객을 편하게 받을 수 있는가가 경쟁력이 되었다. 고인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라는 물음은 어떤 빈소를 고르고 음식을 얼마나 차릴 것인가라는 물음에 자리를 내주었다.
가장 슬프고 경황없는 순간에 유가족은 소비자가 된다. 가격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안내받은 대로 결정한다. 이는 특정 업체의 욕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장례의 중심이 고인에서 시설로 옮겨 가면서, 장례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상품이 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상품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상품이 장례의 목적을 대신하게 된 것이 문제다.
병원 장례식장이 짊어진 책임
병원 장례식장을 곧바로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의료법인이 장례식장을 부대사업으로 운영하는 것은 현행법상 허용되어 있고,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가까운 곳에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편의도 분명하다. 다만 법적으로 허용된다는 사실이 운영 방식의 윤리적 정당성까지 보증하지는 않는다.
병원은 위생과 감염 관리를 무엇보다 앞세우는 공간이다. 의료 현장에서 그 원칙은 옳고 필요하다. 그러나 같은 논리가 장례에 그대로 들어오면서 고인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고인은 위생과 안전을 이유로 냉장 시설에 안치되었고, 가족이 곁을 지키던 자리에는 영정사진만 남았다. 고인이 빈소에서 냉장고로 숨겨진 것이다. 위생이라는 정당한 가치가 장례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순간, 마지막 인사를 나눌 가족의 시간은 자리를 잃는다.
게다가 가족을 잃은 사람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이고, 병원이 안내하는 절차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의료기관에 대한 신뢰가 장례식장 선택으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다. 그렇다면 최소한 세 가지는 지켜져야 한다. 유가족이 장례식장을 스스로 고를 수 있어야 한다. 고인을 모시는 일이 영업과 운영의 편의에 앞서야 한다. 비용과 수익 구조는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이는 병원뿐 아니라 모든 장례시설에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시신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모든 장례에서 고인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고인의 뜻과 유가족의 선택, 종교적 신념, 위생과 안전은 존중되어야 하며, 냉장 안치 역시 현대 장례에 필요한 시설이다.
핵심은 고인이 어디에 계시느냐가 아니라, 그 자리가 고인과 남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마련되어 있느냐에 있다. 가족이 원하는 만큼 고인 곁에 머물 수 있는지, 쫓기지 않고 작별할 수 있는지가 장례의 질을 가른다.
주인공을 제자리로
위생과 추모는 서로 부딪히는 가치가 아니다. 부딪히는 것처럼 보인 까닭은 시신을 다루는 일과 의례를 치르는 일이 한 덩어리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둘을 나누어 생각할 때 길이 열린다.
시신의 안치와 위생 관리, 운구는 전문성과 안전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기준을 갖춘 전문 시설과 인력이 엄정하게 맡으면 된다. 반면 의례는 고인을 기억하고 작별하는 시간이며, 그 설계의 기준은 위생이 아니라 고인과 유가족이어야 한다. 시신의 관리는 관리대로 철저히 하되, 의례의 시간과 공간이 그 관리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나누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고인은 안전하게 안치하되, 가족이 원할 때 고인 곁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별도의 작별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고인을 마주하기 어려운 가족에게는 영정과 유품, 생전의 이야기로 꾸린 추모의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하는 이는 시설이 아니라 유가족이다.
변화는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 빈소를 접객 공간이 아닌 추모의 공간으로 설계하는 것, 안치 공간과 빈소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 시설의 규모와 매출이 아니라 고인에 대한 예우와 유가족의 애도 지원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 장례지도사를 절차 진행자가 아니라 고인을 정성껏 모시고 가족의 이별을 돕는 전문가로 존중하는 것이다.
장례의 주인공은 고인이다. 우리는 장례식장을 더 크고 편리하게 지어 왔지만, 그 안에서 고인을 기억하고 작별하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지 않았는가. 혁신은 더 큰 시설이나 새로운 상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시신의 관리와 의례를 각자의 자리에서 제대로 해내고, 그 한가운데에 고인을 다시 모시는 일, 그것이 출발점이다.
장례는 고인을 모시는 일에서 시작해 고인을 기억하는 일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