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과 산분, 그 사이의 선택지 ⑤엇갈리는 두 개의 시선

봉안인가, 산분인가 - 엇갈리는 두 개의 시선
바세루른과 레겐우른을 한국 장사법의 틀에 놓고 보면, 정반대의 두 가지 해석이 동시에 가능하다.
첫 번째는 이를 야외에 설치된 봉안묘로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장사법은 지상에 무덤 형태로 조성되는 봉안시설, 즉 봉안묘라는 카테고리를 이미 두고 있으며 높이 70센티미터, 1기당 면적 2제곱미터라는 구체적 기준까지 정해두었다. 형태만 놓고 보면 바세루른·레겐우른의 지상 구조물은 이 범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더해 법은 봉안된 유골을 이후 자연장으로 전환하는 절차, 즉 개장이라는 개념도 이미 알고 있다. 이 논리를 따르면 두 제품은 평소엔 밀폐된 봉안 상태를 유지하다가, 유족이 원하는 시점에 정식 절차를 거쳐 자연장으로 넘어가는 구조로 설계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문제는 원본 제품의 핵심이 바로 이 지점과 충돌한다는 데 있다. 빗물이 조용히, 저절로 유골을 흙으로 옮기는 과정에는 애초에 신고나 절차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이 해석을 따르더라도, 실제로는 봉안도 아니고 자연장도 아닌 상태가 수년간 지속되는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이를 진행중인 산분으로 보는 시각이다. 자연장의 정의 자체가 유골을 흙 밑이나 주변에 묻거나 뿌려 장사하는 행위인 만큼, 지상의 금속 구조물은 그 전체 과정을 담는 매개체일 뿐 별도의 봉안시설이 아니라는 논리다. 결국 도달하는 지점이 산분이라면, 그 과정 자체를 산분으로 봐야 한다는 발상이며, 원본 제품이 지닌 "서두르지 않는 이별"이라는 철학과도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해석이다. 그러나 장사법 시행령은 자연장의 요건을 도달점이 아니라 안치하는 그 순간의 상태로 규정해두었다. 지면으로부터 30센티미터 이상의 깊이, 생분해성 재질의 용기라는 두 조건 모두 묻는 시점에 이미 충족되어 있어야 하며, 몇 년 뒤에 결국 그렇게 된다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안치 당시 유골은 지상에, 청동이나 코르텐강이라는 비생분해 재질 속에 있다. 개념적으로는 산분의 과정이지만, 법이 요구하는 스펙은 그 시작점에서부터 어긋나 있는 셈이다.
법이 판단하지 못하는 것
한국의 장사법은 유골이 처한 상태를 시간의 흐름 없는 정적인 스냅샷으로 규정하고 있다. 봉안인가 아닌가, 자연장의 조건을 충족했는가 아닌가. 이 모든 판단은 어느 한순간을 잘라내어 그 단면을 검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바세루른과 레겐우른이라는 발명품이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애초에 그 전제 자체를 향해 있었다. 이별이 하루아침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과정이듯, 유골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 역시 어느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흘러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 법은 순간을 판단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발명품은 과정을 설계하고 있다. 이 어긋남이야말로 두 해석이 각기 다른 지점에서 무너지는 근본적인 이유다.
결국 봉안으로 보든 산분으로 보든, 지금의 법 조문은 이 발명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는 이 제품이 잘못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법이 상상하지 못했던 세 번째 방식, 순간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안장이라는 개념을 이 제품이 앞서 제시하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유럽은 되고, 한국은 안 되는 이유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 발명품이 유럽에서는 제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국에서는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발명품의 완성도 차이도, 두 사회의 열린 정도 차이도 아니다. 문제는 각자의 법이 애초에 무엇을 규제 대상으로 삼았는가, 그 설계 지점 자체에 있다.
독일의 국가·주 단위 법은 딱 한 가지만 강하게 규정한다. 유골은 반드시 지정된 묘지 안에서 처리되어야 한다는 장소의 원칙이다.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쓸 것인가는 처음부터 국가의 관할이 아니었다. 그건 각 지자체가 자기 지역 묘지 조례에 써넣기 나름인 문제였다. 그래서 바세루른이라는, 기존에 없던 방식이 나타났을 때 독일은 국가법을 단 한 줄도 고칠 필요가 없었다. 뒤렌이나 바트홈부르크 같은 지자체가 자신들의 조례에 항목 하나를 추가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애초에 그 정도의 결정권이 지자체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사법은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무엇이 봉안이고 무엇이 자연장인지, 그 경계를 국가가 직접 긋는다. 자연장이라면 지면으로부터 몇 센티미터 깊이에 묻어야 하는지, 어떤 재질의 용기를 써야 하는지까지, 국회를 거친 법률과 그 하위 시행령이 이미 확정해두었다. 지자체는 이 스펙을 조례로 손댈 권한이 없다. 그러니 새로운 방식이 나타나면,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지자체가 아니라 국가 자체가 된다. 대만처럼 아예 국가법 안에 새로운 안장 유형을 정식으로 추가하는 개정을 거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기존의 좁은 카테고리 두 개 중 하나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수밖에 없다.
결국 유럽에서 가능했던 것은 그 사회가 더 관대해서가 아니라, 애매한 새로운 발명품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권한이 현장에 가장 가까운 단위, 즉 지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 같은 결정을 내리려면 가장 먼 단위, 즉 국가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발명품은 언제나 애매한 채로 태어난다. 그 애매함을 누가,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판단해줄 수 있는가. 그 차이 하나가, 같은 아이디어를 두고 한쪽에서는 이십 년째 살아 있는 제도로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작조차 못 하게 만든다.
그러니 이 시리즈가 내려야 할 결론은 이것이다. 문제는 발명품에 있지 않다. 문제는 새로운 방식을 판단할 권한이 이 사회 어디에도, 충분히 가까운 곳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법을 고치는 일보다 어쩌면 더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애도의 방식을 결정할 권한을 누구에게 얼마나 나누어줄 것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