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회귀

잔디 대신, 돌나물은 어떨까

다비코 2026. 9. 5. 14:19

반복되는 벌초, 다른 답을 찾은 유럽의 묘지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일은 원래 봉분의 흙을 지키기 위한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이 실용성은 어느새 해마다 짊어져야 할 부담으로 바뀌었다. 추석이 다가오면 전국 산야에 예초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조상의 봉분을 덮은 잔디와 잡초를 깎아내는 벌초는 오래된 풍경이지만, 그 무게는 해마다 조금씩 더 버거워지고 있다.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로 벌초할 사람 자체가 줄고 있다. 벌초 대행업체를 찾는 발길이 늘고, 형제자매끼리 날짜를 맞추기 어려워 추석 직전에야 부랴부랴 다녀오는 집도 흔하다. 여기에 해마다 기록을 갱신하는 폭염은 잔디마저 버티기 힘들게 만든다. 여름 땡볕에 누렇게 타들어간 봉분, 장마 뒤 폭우에 쓸려나간 흙더미를 마주하는 일도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 익숙한 고민에 대해, 유럽의 묘지들은 이미 다른 답을 실험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헤르덴킹스파르크 베스트가르더 묘지에는 지난해 10월 '인스피라티펠트(Inspiratieveld)'라는 구역이 새로 문을 열었다. 잔디 대신 세덤으로 무덤을 꾸미는 여섯 가지 방식을 전시하는 시범 구역이다. 헤이그의 베스트데윈 묘지는 2005년부터 추모광장 주변을 세덤으로 덮었고, 노르웨이 롬메달렌 교회 묘지는 2013년 경사면 전체를 세덤 매트로 조성했다. 도에틴험의 한 자연장 묘지는 화장장 건물 지붕 600㎡를 세덤과 허브 혼합종으로 덮기도 했다.

 

유럽의 묘지 조경업체들이 밝히는 이유는 한결같다. 검은 묘석이 50도까지 달아올라도 세덤은 버틴다. 몇 주씩 방문하지 못해도 스스로 수분을 머금고 살아남는다. 촘촘한 뿌리가 빗물을 흡수해 폭우에도 흙이 쓸려나가지 않는다. 여름이면 노란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벌초할 필요가 거의 없다.

 

흥미로운 건 이 식물의 영문 이름 자체가 무덤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학명 Sedum sarmentosum, 영어로는 'graveyard moss(무덤 이끼)'라 불린다. 갓 조성되어 흙이 드러난 무덤 위에 빠르게 초록빛을 덮으려고 심었던 미국의 오래된 관습에서 나온 이름이다. 그리고 이 식물의 원산지는 다름 아닌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다. 우리가 봄이면 초고추장에 무쳐 먹는 나물, 바로 돌나물이다.

 

 

잔디와 세덤, 무엇이 다른가

 

실제로 세덤은 잔디보다 나은 선택일까. 몇 가지 기준으로 비교해보면 차이가 뚜렷하다.

 

잔디는 연간 서너 차례 이상 벌초가 필요하지만, 세덤은 한 해에 한 번도 손대지 않아도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분명한 원리가 있다. 세덤은 줄기가 땅에 닿는 자리마다 뿌리를 내리며 빠르게 퍼져 촘촘한 매트를 이룬다. 이 매트가 토양 표면에 닿는 햇빛을 대부분 가로막아 잡초 씨앗의 발아를 어렵게 만들고, 동시에 얕고 촘촘한 뿌리가 표토의 수분과 양분을 먼저 차지해 새로운 잡초가 뿌리내릴 자리를 주지 않는다. 잔디가 웃자라면 그 틈으로 잡초가 파고드는 것과 정반대로, 세덤은 스스로 잡초를 몰아내는 구조인 셈이다.

 

가뭄에 잔디는 관수가 필요하지만, 다육질 잎에 수분을 저장하는 세덤은 별도의 물 없이도 버틴다. 폭염에 잔디는 갈변하거나 고사할 위험이 있는 반면, 세덤은 50도에 가까운 지열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게 유럽 업체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뿌리 구조도 세덤 쪽이 더 촘촘해 폭우에 따른 토양 유실 방지에 유리하다.

 

물론 세덤도 만능은 아니다. 초기 조성 비용은 잔디 씨앗보다 매트나 모종을 심는 세덤 쪽이 조금 더 든다. 다만 이후 몇 년간 들어가는 관리 비용과 노동력을 따지면, 장기적으로는 세덤 쪽이 훨씬 적게 든다는 게 유럽 사례들이 보여주는 결론이다.

 

여기에 색감이라는 요소도 있다. 잔디는 계절 내내 비슷한 초록빛이지만, 세덤은 품종에 따라 노랑과 주황, 붉은빛까지 다채롭게 물든다. 여름엔 꽃이 피고 가을엔 잎끝이 붉어진다. 짧게 깎인 잔디로 채워진 삭막한 풍경 대신,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무덤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얘기다.

 

잔디대신 세덤을 심은 묘지 - AI합성

 

유럽보다 유리한 조건, 우리에게 있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 식물을 새로 들여올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럽보다 유리하다. 돌나물은 원래 한반도 산과 들, 바위 틈에서 흔히 자생해온 식물이다. 한방에서는 석지갑(石指甲), 수분초(垂盆草), 석상채(石上菜) 등으로 불리며 오래전부터 약재이자 봄나물로 쓰였다.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번식하는 생태적 강인함은 이미 우리 산천에서 수천 년간 검증되어 온 셈이다. 외래종 도입에 따르는 생태계 우려도, 낯선 식물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

 

특히 매년 여름 기록을 갱신하는 한국의 폭염을 감안하면, '기후 대응형 묘지 식물'이라는 문제의식은 유럽보다 한국에서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번 추석엔, 질문 하나쯤 던져봐도

 

물론 모든 무덤의 잔디를 당장 걷어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립묘지나 오랜 전통을 지닌 왕릉처럼 상징성이 큰 공간은 지금 방식을 지키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매년 벌초 일정을 맞추기 힘든 개인·가족 묘지, 새로 조성되는 자연장·수목장, 돌볼 후손이 마땅치 않은 무연고 묘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돌이켜보면, 앞서 살펴봤던 조선의 묘제 역시 획일적으로 잔디만 고집하지는 않았다. 상황에 맞는 식물을 골라 봉분을 지키는 감각이 그 안에 이미 있었다. 그 감각은 지금도 봉분과 잔디라는 기본 골격 자체는 그대로 유지한 채, 관리 부담만 갈수록 무거워지는 형태로 남아 있다.

 

올해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혹은 추석 성묘를 다녀오는 길에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노동을, 계속 이렇게 짊어져야만 할까. 이름부터 무덤과 얽혀 있던 이 식물이 유럽에서는 이미 정책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식물이 공교롭게도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이라면, 망설일 이유는 크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