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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여행

거지와 상여도가 그리고 장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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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도가(喪輿都家)'라고 들어본적 있나요?

일반적으로 장의사라는 직업은 일제시대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망자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장의사 역할을 맡아서 했고,상례를 잘 모르는 경우에는 마을에서 상례에 밝은 어른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수원 등 도심지에서는 '상여도가(喪輿都家)'라는 상점이 있어, 이곳에서 장의용품이나 염쟁이, 상여꾼들을 청해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상여도가(喪輿都家)는 조선초기 이마에 자자형(낙인)을 받은 죄인들과 거지들이 제대로 한번 살아보겠다고 모여서 만든 일종의 장례전문상점으로 서울의 경우, 광교 수표교 다리 밑(수표동)과 복청교(경복궁에서 종로로 건너가는 다리) 밑, 서소문 성밑, 새남터(이촌동), 한강뚝(한남동), 만리고개(만리동) 등에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족이나 사대부집에서 상을 당하면 포도청에 방상수와 상여꾼을 뽑아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포도청에서는 거지들의 우두머리 꼭지딴에게 요청을 하였답니다. 이때문에 꼭지딴은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방상수와 수번,상여꾼들을 대기시켜 놓았고, 이것이 상업화 되면서 상여도가(喪輿都家)라는 일종의 체인형 장례상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상여도가는 조선 중엽(18세기경)에 정착화 되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성업을 이루었으며 고관대작은 물론 왕의 장례에 까지 깊이 관여했다고 합니다. 또한 거지집단 특유의 조직적인 유통망과 체계적인 서비스로 전국을 일원화하여 성공적인 비지니스로 정착시켰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자국의 장의사를 도입하여 영업을 하기시작하자 위기를 느낀 상여도가는 이름을 '장의사'로 같이 바꾸어 달고 상여대신 영구차를 도입하는 등 현대화 된 장례서비스를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상여도가를 운영해 오던 꼭지딴 그룹(거지 집단)은 모아놓은 자본과 인력을 동원,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를 적발한 식민지 당국이 거지조직을 해산시켜 조직된 힘이 무너지게 되었고 이후 개인화된 장의사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화된 장의사는 기존의 거지와 백수건달 등 주로 불우한 사람들이 맡아서 운영을 했는데, 이들의 이기적이고 돈만 밝히는 얄미운 행동으로 인해 '깍쟁이'라는 별명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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